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수정의 시선

은둔형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윤석열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씨가 제20대 대선 닷새 전인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서초1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 김건희씨는 두 달 뒤, 윤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역대 12번째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연합뉴스]

윤석열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씨가 제20대 대선 닷새 전인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서초1동 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투표를 하고 있다. 김건희씨는 두 달 뒤, 윤 당선인의 대통령 취임과 함께 역대 12번째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연합뉴스]

외교 등 대통령 부인 역할 분명

제2부속실 기능 그대로 살려야  

예산·임무 법제화도 추진할 만

지난 9일 치러진 20대 대통령 선거는 초박빙으로 결론 났다. 표차는 0.73%포인트. "이겼지만, 앞으로 참 힘들겠다"는 말이 정권교체를 이룬 윤석열 당선인을 향해 쏟아진다. 더불어민주당이 거대 의석을 확보한 상황에서 신승이 주는 동력은 약할 수밖에 없어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당선인은 국민의힘 정부로 부르겠다고 했다)의 앞날을 말하는 이들 중엔 "배우자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 걱정"이라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역대 대선 캠페인 기간 미디어에 비치는 배우자의 모습은 대개 플러스 역할을 했지만 이번엔 양당 후보 배우자가 긍정적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윤 당선인의 부인 김건희씨는 경력·학력 허위 의혹과 이른바 '7시간 통화' 등으로 부정적 이미지를 쌓았고, 이재명 후보의 부인 김혜경씨는 성남시장 및 경기도지사 부인으로 있으면서 공무원을 사용(私用)하고, 법인카드를 유용했다는 내부 고발을 당했다. 김건희씨는 아예 등판도 하지 않았고, 김혜경씨는 유세가 절정일 때 숨어 버렸다.
 선거 기간 양 지지층 모두에서  "OOO이 대통령 될까 봐 OOO 찍는다" 못지않게 "OOO이 퍼스트레이디 되는 거 보기 싫어 OOO 찍는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렸다.
 두 달 후면 50세 김건희씨가 역대 12번째 퍼스트레이디가 된다. 윤 당선인은 일찌감치 청와대 제2부속실을 폐지하겠다고 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종식을 위해 청와대를 슬림화하겠다는 것이지만, 배우자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면도 있지 않나 싶다. 김건희씨도 선거 후 "영부인보다 대통령 배우자로 불리면 좋겠다. 해외에선 대통령 배우자가 원래 하던 직업을 갖고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사례가 많지만, 저는 당선인이 국정만 전념하도록 내조하겠다"고 했다. 본인이 대표인 미술 전시기획사 코바나컨텐츠를 영리 목적으로 운영하지 않고, 소외계층 중심의 조용한 내조에 전력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코바나컨텐츠는 영리든 비영리든 이해충돌의 문제가 있으니 5년간은 손을 떼는 게 맞다. 호칭도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라 하면 될 일. 하지만 제2부속실이 문제다.
 활동해도 안 해도 욕먹고, 화장하면 한대로, 안 하면 안 한 대로 말을 듣는 게 정치인 배우자인데, 대통령 배우자는 오죽할까. 이번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된 조은희 전 서초구청장은 2007년 『한국의 퍼스트레이디』란 책을 내며 퍼스트레이디를 권력 심장부의 동행자이지만 '국민의 시선이라는 감옥 아래 살았던 수인'이라고 규정했다. 최고 권력의 배우자가 갖는 책임감이 그들의 삶을 압도했다는 얘기일 테다.
 사실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스위스에서 만나 그의 집권과 하야, 하와이 망명을 지켜보고 한국 땅에 묻힌 프란체스카 여사를 비롯, 공덕귀·육영수·홍기·이순자·김옥숙·손명순·이희호·권양숙·김윤옥 등 한국의 퍼스트레이디들은 한두 줄로 압축할 수 없는 영욕의 삶을 살았다.

외교 등 대통령 부인 역할 분명 #제2부속실 기능 그대로 살려야 #예산·임무 법제화도 추진할 만

 전직 외교관이 전해준 일화. 아들의 구속 즈음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 해외 순방길에 오른 손명순 여사가 영부인 간 티타임 직전 도무지 자식일로 준비해 온 말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단다. "여사님은 아무 말이나 하시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손 여사가 가족 대소사를 얘기하면, 그 외교관은 양국 청소년 문화 교류 필요성을 현지어로 얘기했다고 한다. 행사 취소는 외교적 결례라, 심신이 피폐해도 일정을 소화했다는 얘기다.
 청와대 부속실에서 배우자 의전 등을 전담하는 제2부속실로 떼어낸 건 육영수 여사다. 이른바  '퍼스트레이디 프로젝트'다. 육 여사는 국민에 다가가려 사투리도 고치고, 옷차림에도 신경 쓰고, 오만해 보일까 차 안에서도 등을 대고 앉지 않았다고 한다. 소록도 등 본인이 찾아볼 곳을 제2부속실을 통해 손수 챙겼다.
 여성운동가 출신 이희호 여사는 77세 늦은 나이에 청와대 안주인이 됐지만, 단독 해외 순방을 5차례나 갔고 유엔 총회 기조연설도 했다. 역대 퍼스트레이디들이 나름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외교에선 각국 정상 옆에 늘 퍼스트레이디의 몫이 있다. 미소 냉전 해체의 막후 공로자로 인정받는 낸시 레이건 같은 사례도 있다.
 김건희씨가 '은둔의 퍼스트레이디'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면 제2부속실(이름은 바꾸더라도) 기능은 그대로 두는 게 맞다. 배우자 활동을 위한 자원이 다른 조직에서 투입돼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참에 미국처럼 법률로 퍼스트레이디의 예산·임무 등을 규정하는 것도 방법이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상식적으로, 투명하게만 하면 될 일이다. 최근 김정숙 여사 의상 등 의전 지출 내역과 특별활동비를 공개하라는 법원 판결에 청와대가 항소로 거부한 건 반면교사로 삼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