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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식의 이코노믹스

보편적 가치·원칙에 기초해 미·중에 ‘노’ 할 수 있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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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대외 통상정책, 이렇게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국제통상법센터장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국제통상법센터장

지난달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금융제재와 수출통제로 미국 기술이나 소프트웨어가 사용된 제품들의 러시아 수출이 막히고 러시아 진출기업들의 현지 영업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위험에 처하게 됐다. 우리 경제안보를 위협하는 요인들이 도처에 있음을 일깨워준 사건이다.

우리를 둘러싼 대외 경제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동안 세계경제 질서를 뒷받침해왔던 세계무역기구(WTO)가 약화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뼈아픈 변화다. 이제는 다자 규범에서 말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힘 있는 국가가 주장하는 것이 정의가 되는 시대가 되고 있다. 세계 경제 질서가 각자도생하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그동안 세계화에 편승해 글로벌 공급망을 구축하고 전 세계로 판매영역을 넓혀온 우리 기업들은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노출되고 있다.

경제 질서 급변하며 새로운 판 형성
WTO 힘 빠지며 각자도생 분위기
미·중 사이 전략적 모호성 끝내야
경제 문제는 한쪽 선택할 필요 없어

여기에 미·중 패권경쟁도 우리의 경제안보를 위협하는 주된 요소다. 그동안 안미경중(安美經中),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라는 이름으로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하던 한국의 입지도 축소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이 중국 견제에 동참하라고 손짓하고 있다. 지난해 3월 발표된 ‘국가안보전략 예비지침’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민주주의적 가치를 옹호하는 동맹국들과의 협력을 통해 중·러 등 권위주의적 국가들의 위협에 대응하겠다는 국가 안보전략을 제시했다. 경제안보가 곧 국가안보라 했다. 그러면서 미국의 동맹으로 호주·일본과 함께 한국을 콕 집어 언급했다.

전시 아닌 한 안보·경제 분리해야

미국이 제안한 ‘인도-태평양 경제협력체(IPEF)’도 결국 미국의 중국 견제전략의 하나다. 2월 초 공개된 ‘인도 태평양 전략’에서 미국은 인도 태평양 지역이 중국의 위협과 도발이 가장 두드러지는 지역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경제협력에 집중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한국은 이미 이 협의체 멤버로 참여하라는 초청장을 받아놓은 상태다.

중국은 미국의 중국 견제전략에 대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반(反)외국제재법’을 제정해 미국의 대(對)중국견제에 동참하는 국가에 대해서는 상응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했다. 뒤이어 12월 말에 발표된 수출통제 백서에서는 한편으로는 미국 등 서방국들이 중국을 상대로 한 수출통제를 남용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을 타깃으로 하는 수출통제에 대해서는 중국도 주요 물자의 수출통제로 맞설 것을 시사했다. 중국이 쥐고 있는 원자재 공급망을 반격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중 대결 구도하에서 우리의 경제안보 전략은 미·중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특히 미국과 안보동맹을 맺고 있고, 중국과는 떼기 어려운 경제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에서 ‘안보문제와 경제를 분리할 수 있는가’가 첫 번째 질문이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대선, 여야 후보들의 공약에서 안보와 경제의 상관관계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이재명 후보는 한·미동맹을 포괄동맹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하면서도, 경제문제에서는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 노선’을 유지하겠다고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중 경쟁을 국익 증진의 기회로 활용하겠다고 한다. 심화하는 미·중 패권경쟁 틈에서 미·중 경쟁을 이용해 실리를 얻겠다는 전략이 통할지 의문이지만, 적어도 안보문제를 경제와 분리하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이해된다.

윤석열 후보의 공약은 한마디로 한·미동맹 강화다. 견고한 한·미동맹을 한국외교의 중심축으로 설정할 것이며, 미국과의 안보동맹 관계를 발전시켜 경제 및 안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맹관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중 협력관계는 안보 문제가 경제 문제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기초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과의 안보동맹은 우리 경제안보의 기초라 할 만큼 중요하다. 한·미동맹은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를 위한 동맹이라는 시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전 세계 안보와 국가안보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안보를 위해서는, 전시(戰時)가 아닌 한 안보와 경제를 분리해서 다루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의 국제정세 속에서 경제를 안보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렇다고 경제를 안보의 수단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경제안보는 경제 그 자체의 안전보장을 의미한다.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 침묵 안 돼

적자와 흑자를 오가는 무역수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적자와 흑자를 오가는 무역수지.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런 의미에서 한·미 동맹을 경제와 안보를 결합한 포괄적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신중해야 할 것이다. 물론 한국과 미국은 경제적으로 협력해야 할 분야가 많다. 공급망 다각화나 첨단기술 개발 등이 그런 예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경제 공조로 우리의 경제적 이익을 우리 스스로 좁히는 것은 피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보듯 미국과 유럽연합(EU)은 안보적 측면에서는 공조하지만, 경제적 문제에서는 반드시 같은 입장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5월 10일에 들어설 새 정부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은 우리의 대외 통상정책에서 전략적 모호함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정부는 특히 중국이 관련된 대외 통상문제에서 애매한 입장을 취해 왔다. 그러나 이제 이런 전략적 모호함으로 국제경제적 도전에 대응하기 어렵다.

안보문제가 아닌 경제관계에서는 미국과 중국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국가를 선택하는 대신 보편적 가치와 타당한 원칙을 선택해야 한다. 합당한 가치와 원칙에 부합하지 않으면 중국은 물론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히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원칙 없이 실리만 좇는 통상정책으로는 누구한테도 존중받지 못하고, 오히려 결정적인 국가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실리마저 잃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무엇보다 중국의 비(非)시장적 관행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는 중국 정부의 막대한 산업보조금, 설비 과잉, 기술이전 강요행위 등 국가 주도의 비시장 관행을 비판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중국을 의식해서 중국의 비시장 관행을 비판하지 못했다.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로 피해를 보면서도 반덤핑이나 상계관세조사 개시 혹은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을 자제해 왔다.

통상질서 재편에 우리 입장 밝혀야

하지만 중국의 비시장 관행은 원칙에 관한 문제다. 한국이 원칙에 대해 침묵하는 한 새로운 국제통상질서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2020년 1월 미국·EU·일본 등 3국은 중국의 비시장 관행을 규제하기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기로 하는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규범화 작업을 하고 있다. EU는 이미 공동선언의 내용을 반영한 해외 보조금 규제법을 도입하는 중이다. 한국이 중국의 비시장 관행에 눈감는 한 이러한 국제통상질서 재편과정에 참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과 EU가 추진하는 글로벌 철강협약(GSSA)도 중국의 비시장 관행 규제가 주된 목표다. 지난해 12월 미국과 EU는 미국이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EU산 철강에 부과한 관세를 관세율 쿼터(TRQ)로 전환하기로 합의하면서, 철강과 알루미늄의 공급과잉과 과다 탄소배출을 규제하는 글로벌 협약(GSSA)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지난 2월 초에는 일본도 미국과 232조 합의를 종결하면서 위 철강협약에 참여하기로 했다. 한국이 이 협상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 철강산업의 이익을 방어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중국의 비시장 관행 규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는 한국에 협상참여의 문이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WTO 기능 회복에 전력 쏟아야

힘이 아닌 ‘규칙’에 의해 작동되는 다자주의 통상질서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에 대해 규칙기반 다자주의를 옹호하고 WTO 기능의 회복에 나서도록 촉구해야 한다. 미국이 WTO 기능회복의 전제로 중국의 잘못된 관행을 규제하기 위한 새로운 규범을 만들고자 한다면 한국도 적극 협조해야 한다.

일방주의적 세계질서를 주도하고 있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냉전 시대에 만든 1962년 무역확장법 232조의 ‘국가안보’ 개념을 확장 해석해 2018년 우방국들로부터 수입되는 철강 및 알루미늄 제품에 대해서도 25%, 10%의 관세를 부과했다. 한국은 종전 수출의 70% 수준으로 수출을 감축하겠다고 약속해 232조 관세를 면제받았다.

이런 일방주의적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리 통상정책의 지향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김두식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국제통상법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