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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 ‘경제 국수주의’ 노골적, 기간산업 M&A 불허 많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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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15면

[M&A의 세계] 마지막 관문 ‘기업결합심사’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조건부 승인 결정을 내렸다. 향후 독과점이 예상되는 노선들의 슬롯(운항권)을 반납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고 대한항공도 수용했다. 이렇게 1년이 넘게 걸린 두 항공사의 인수 합병이 마무리될 것 같지만 실상은 이제 시작으로 봐야 한다. 미국·중국·유럽연합(EU)·일본 등 주요 국가의 승인을 받는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형 인수합병(M&A)거래에 대한 각국 정부의 기업결합심사가 마지막 관문으로 부각되고 있다. 대부분의 국가는 자국 기업은 물론 해외 대기업 간의 M&A 거래에 대해 심사하고 승인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 절차를 기업결합심사라고 부르는데,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위원회, 미국의 연방거래위원회(FTC)나 외국인투자위원회(CFIUS) 등이 수행한다. 만약 불허 결정이 나오면, 해당 국가에서의 영업이 불가능하다. 사실상 M&A로 얻을 이익이 사라지기 때문에 거래가 무산되는 것이다.

약 80조원 규모로 반도체 산업 역사상 가장 큰 거래가 될 수 있었던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ARM 인수가 무산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 거래는 미국·영국·EU 등 주요 국가 경쟁 당국에서 기업결합을 불허했다. 모바일 기기에 사용되는 반도체 관련 핵심 기술에 대한 독점이 우려된다는 이유다.

국가 간 이해관계 얽혀 무산되기도

국내에선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우조선해양 인수 무산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현대중공업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하려는 계획을 두고 EU 경쟁 당국은 2년 넘게 검토한 끝에 불허 결정을 내렸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물량의 LNG를 수입하고 있는 EU 입장에선, LNG 운반선 시장의 점유율 60%를 가진 조선사가 탄생해 막강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을 우려했다는 후문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비슷한 사례가 최근 들어 자주 눈에 띈다. 여기선 국가 간 이해관계도 부각된다. 미국 관계 당국의 반대로 무산된 M&A 거래로는 2018년 중국 앤트 파이낸셜의 미국 머니그램 인수와 2021년 중국 사모펀드의 미국 매그나칩반도체 인수가 있다. 중국 관계 당국에선 2018년 미국 퀄컴의 독일 NXP 인수와 2019년 미국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의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 인수를 반대했다. 독일 관계 당국에선 올해 대만 글로벌웨이퍼스의 독일 실트로닉 인수를 반대해 거래가 무산됐다.

반면 컴퓨터용 CPU 제조업체인 미국 AMD의 미국 반도체 설계 기업 자일링스 인수는 2년여 만에 주요 국가들의 승인을 모두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중국이 일부 조건을 내걸기는 했지만, 합병이 큰 이슈가 아니라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사업부 인수에서도 각국 경쟁당국의 승인을 받아낸 것과 유사한 사례다.

그렇다면 기업결합심사는 어떻게 진행될까. 전통적으로 기업결합심사는 해당 기업들이 영위하는 시장을 정의하고 그 시장 내에서 합병된 회사의 시장 점유율을 주요 잣대로 두고 진행한다. 기업 M&A 거래가 마무리된 다음 해당 산업 관계자들의 이익이 줄거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는지를 검토해 승인 여부를 결정한 것이다. 쉽게 말해 독과점의 가능성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고,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경우 불허하거나 해소 방법을 제시하도록 조건부 승인을 내리는 경우도 많다.

대한항공·아시아나 합병 승인 관심

최근 기업결합심사에선 전통적인 규제의 시각과는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미·중 무역갈등, 코로나19 이후 공급망 재편 등의 과정에서 볼 수 있었던 각국의 기간산업 보호주의다. 경제적 국수주의 잣대를 노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불허 사례들 대부분이 반도체·IT 분야나 항공·해운·조선 분야인 이유다.

납품업체나 임직원 등이 받을 영향까지도 주요 고려 사항으로 부각됐다. 이런 흐름은 미국에서 두드러진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빅테크 킬러’라 불리는 리나 칸 연방거래위원회 위원장 임명으로 이 같은 흐름을 주도하고 있다. 빅테크 기업들이 M&A를 통해 잠재적 경쟁자를 제거하고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공급자들의 이익을 침해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향후 대형 M&A 거래에서 기업결합신고의 승인 가능성 여부에 대한 사전 검토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여러 국가의 승인을 받느라 거래 종결이 오랫동안 지연되거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부 승인, 혹은 불허 등 각각의 셈법이 복잡하다.

‘요기요’를 보유하고 있던 독일 ‘딜리버리히어로’가 ‘배달의민족’을 인수하려 하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요기요’의 매각을 조건으로 인수를 승인했던 사례와 유사한 상황이 전 세계 어디서든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쌓아 놓은 현금을 예전처럼 적극적인 M&A 용도로 쓰지 못하게 된 빅테크·IT·반도체·플랫폼 기업들의 고민도 깊어질 것이다. 대한항공의 아사아나 인수건의 최종적인 결과와, M&A시장에서 정중동(靜中動) 상태인 삼성전자의 향후 행보는 매우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이철민 VIG파트너스 대표. 서울대에서 계산통계학 학사, 듀크대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으며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서 일했다. 2005년 VIG파트너스(옛 보고펀드) 설립 당시 창업 멤버로 합류한 뒤 2018년부터 대표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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