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철호 칼럼

레임덕 없는 최초 대통령의 분노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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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이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적폐 청산 발언에 “크게 분노하고 사과를 요구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겨레신문은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의 통화에서 “문 대통령은 검찰 개혁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는 자부심이 있다”며 그 역린을 건드렸다고 보도했다. 친문인 민주당 의원 20명은 “2009년 5월 그날의 아픔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라며 ‘노무현 트라우마’를 자극했다. 대통령의 이례적 분노에는 검찰 개혁과 노무현 트라우마가 두 개의 키워드란 것이다. 그렇다면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로 몰았다”는 문 대통령의 비난에는 진짜 근거가 있는 것일까.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공수처 설치로 상징되는 검찰 개혁 1년 뒤의 현실을 짚어 보자.

요즘 서초동 법조타운에 피해자들이 몰려들고 있다. 과거엔 가해자나 피의자 측이 80%를 넘었다. 경찰과 검찰 수사를 방어하고 법원 형량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대검 강력부장 출신 변호사는 “최근 우리 사무실을 찾는 사람은 절반 이상이 피해자 측”이라고 말했다. 수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답답해하거나 가해자가 적절히 처벌받지 않아 억울하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최대 치적이라는 수사권 조정이 낳은 엉뚱한 부작용이다.

“우리 정부는 적폐 없다”는 오만
수사기관 경쟁이 부메랑 될 수도
부동산 민심 나쁘고 정권 교체론
노무현 정권도 막판 내로남불로
민심에서 멀어지고 지지율 추락

이는 통계로도 확인된다. 지난해 경찰의 평균 사건 처리 기간은 64.2일이다. 2020년의 55.6일보다 열흘가량 늘어났다. 경미한 교통사고 등은 경찰이 바로 내사 종결하는 만큼 피부로 느끼는 수사 지연은 훨씬 심각한 수준이다. 형사 전문 변호사들은 “최근에는 고소·고발 후 두 달이 지나야 수사에 착수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며 고개를 흔든다. 고소·고발인의 불만이 커지기 마련이다.

최근 서울변호사협회 조사에 따르면 수사권 조정 이후 경찰로부터 사건을 부당하게 반려당한 적이 있는 경우가 32.3%에 이르렀다. 이른바 ‘체리피킹(Cherry Picking, 사건 골라 받기)’이다. 국민 입장에선 사건 접수 자체를 거부당하면 국가의 존재 이유가 없다. 억울하게 피해를 보아 수사 기관에 실체적 진실을 밝혀 달라는 가장 기본적 권리가 부정당하기 때문이다.

수사기관의 소극적인 수사로 피해자들에게 증거 수집을 요구하는 경우도 흔해졌다. 이런 틈새시장을 겨냥해 직접 디지털포렌식 서비스를 끼워 파는 로펌까지 등장했다. 원칙적으로 휴대폰이나 컴퓨터 포렌식은 수사기관의 몫이다. 사설 포렌식이 판을 치는 것은 ‘수사의 외주화’나 다름없다. 부담을 떠넘긴다. 결국 잘못된 수사권 조정으로 가해자의 인권만 보호되고 피해자의 인권은 짓밟히는 현실이다. 국민을 위한 검찰 개혁이란 논리가 무색해졌다.

서초동 법조계에서는 문 대통령 분노의 배경이라는 노무현 트라우마에 대해서도 전혀 다른 시각이 나온다. 국회 패스트 트랙에 태우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수사기관 개편이 오히려 문 대통령 퇴임 이후 안전을 위협하는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사사법제도 전문가들은 “수사기관끼리 경쟁을 붙이면 안 된다는 대원칙을 어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공수처와 검찰, 경찰 사이의 견제·보완 관계가 언제 치열한 경쟁 관계로 변질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 극단적 사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다. 군사정권이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대공 경찰 간에 경쟁을 붙여 놓는 바람에 일어난 끔찍한 비극이다.

설사 공수처가 사건을 이첩받아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검찰·경찰이 내사 과정에서 축적한 첩보가 외부로 흘러나갈 경우 공수처는 자칫 봐주기나 사건 뭉개기 의혹을 뒤집어쓰기 십상이다. 거꾸로 이런 덤터기를 피하기 위해 과잉 수사나 인권 침해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번 파동에서 걱정되는 것은 과도한 자신감이다. 문 대통령은 선거 개입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과거 정권들은 대개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 혹독한 중간 심판을 받았다. 임기 후반에는 대통령의 아들이나 형, 실세 측근이 사법처리되면서 저절로 자세가 낮아졌다. 이에 비해 현 정부는 거침없이 일방통행식 질주를 해 왔다. 큰 선거에서 연달아 압승하고 임기 후반에는 권력 수사의 손발을 묶어 놓았다. 임기 말 연례행사였던 광화문 시위는 코로나 사태로 막혀버렸다. 어쩌면 문 대통령은 ‘레임덕 없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지 모른다. 국정 지지율은 40%를 넘나든다.

하지만 착시가 부른 신기루일 수 있다. 여전히 정권 교체론이 50%를 넘고, 서울을 중심으로 부동산 민심은 심각한 수준이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대목은 “우리 정부에는 적폐가 없다”는 오만과 독선이다. 돌아보면 노무현 청와대의 마지막도 닮은꼴이었다. “노 대통령은 21세기에 가 계시고 국민들은 아직 독재시대 문화에 빠져 있다”(조기숙 홍보수석), “참여정부에는 낙하산 인사가 없다. 여당 낙선자에 대한 배려는 나쁜 게 아니다”(김완기 인사수석) …. 결사옹위조들의 내로남불식 유체이탈 화법과 함께 노무현 정권은 민심에서 멀어졌고, 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