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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마음 읽기

병든 선진국과 질병인식불능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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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강명 소설가

장강명 소설가

19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에서는 꽤 배운 이들조차 외국을 잘 몰랐다. 1989년 전에는 인터넷은커녕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았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거의 없었고, 자본주의 진영에서 발행한 잡지도 검열을 거쳐 들어왔다. 받아보면 먹물이 칠해져 있거나 찢긴 페이지들이 있었다.

모든 국경이 바다나 철조망으로 가로막혀 사실상 섬나라인 땅에서, 그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선진국은 말 그대로 상상의 공간이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제도, 문화 수준, 시민의식과 국민성을 그 가상의 풍경과 비교하며 근거 없는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고 열등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연예인 ‘조공’, 백화점 ‘오픈런’
헛헛한 마음을 노리는 장삿속
새 풍속 접하며 느끼는 당혹감

유럽을 제대로 경험하고 돌아온 이는 극히 드물었고, 미국은 한국과 너무 달랐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곁눈질로 쉽게 관찰할 수 있었던 선진국은 일본이었다. 일본을 배워야 돼. 일본에서는 이렇게 안 해. 거기는 아주 거리가 깨끗해. 일본 학생들은 겨울에도 반바지를 입어. 일본인들은 약속을 지켜. 그런데 일본 놈들은 겉과 속이 달라. 지독한 녀석들이야…….

일본을 다녀온 사람들은 ‘코끼리 밥솥’을 앞에 놓고 그런 이야기를 풀곤 했다. 1990년대까지 일본은 애증의 롤 모델이었다. 성공은 성공대로, 실패는 실패대로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이라고 여겼다.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그들의 병폐를 말하기도 했다. 우리와 닮은 데도 많지만, 아무래도 걔들은 문화가 좀 변태스러워. 이게 대강의 인식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어린 시절 전해 들은 일본의 유행 중에 당시 특히 이해되지 않았던 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명품에 열광하는 모습이었다. 부자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들조차 샤넬이니 구찌니 하는 럭셔리 브랜드의 사치품을 몇 점씩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집단주의 분위기 속에서 그런 물건으로 사소하게 주목받으려는 개인의 욕망이라는 식의 해석이 따랐다.

다른 하나는 10대 소녀 아이돌을 쫓아다니는 중년 남성 팬들이었다. 조카, 아니 자식 나이일 연예인의 콘서트장에서 환호하는 일본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남우세스럽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아무리 봐도 음악이 아니라 그 소녀들의 신체에 열광하고 있었다. 다 큰 어른들이 왜 저러는 거야? 부끄럽지도 않은가?

30년이 가까이 세월이 흘러, 두 풍경은 이제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다. 음, 지금 한국이 한술 더 뜨는 거 아닌가 싶은데. 걸그룹과 보이그룹 멤버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삼촌팬, 이모팬. 한파에 백화점 명품관 앞에서 새벽부터 줄을 섰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매장으로 달려가는 청년들. 거기에 먹방 유튜버에 흠뻑 빠진 10대까지 더하면…….

나름의 이유야 있다. 분석 기사도 나온다. 몇몇 사치품 브랜드의 상품은 재테크 수단이 된다고 하고, 팍팍한 현실에서 소비로 자신을 위로하려는 심리도 있다고 한다. ‘덕질’이 무미건조한 삶에 열정을 준다고, 먹방을 보며 대리만족을 얻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런 설명이 진단이 아니라 정당화의 도구로 쓰일 때 나는 위화감을 느낀다. 내가 생각하는 보다 큰 진실은 이렇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기는 했는데, 병든 선진국이 되었다고. 어느 정도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선진국들이 다 같이 거품경제기의 일본처럼 되어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필연인가 보다. 헛헛한 정신을 노리는 시장이 생긴다.

여기서 과거 한국의 가난, 권위주의, 가부장제를 지적하며 현재의 모습을 옹호하는 것은 논점 이탈이다. 나는 한국 사회의 여러 성취에 경탄하고 기뻐한다. 그와 별개로 지금 우리 주변에 병리 현상들이 있다. 그리고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므로, 보고 베껴야 할 롤 모델은 없다. 우리가 길을 찾아야 한다.

불법은 아니지만 바람직하지 않은 광경에 대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리라. 그걸 두고 꼰대스럽다고 손가락질하는 게 요즘 분위기인 것 같다. 하지만 나이 먹었다고 더 현명한 게 아니듯, 젊다고 더 깬 것도 아니고, 새 풍습이 옛것보다 늘 낫지도 않다. 만약 그렇다면 역사에 퇴행은 없어야 한다.

질병인식불능증이라는 증세가 있다. 조현병이나 거식증, 양극성장애를 앓는 이 상당수가 자기가 멀쩡하다고 주장하며 치료를 거부하고, 그 바람에 상태가 더 나빠진다. 나는 지금 우리 사회가 겪는 공허와 불안에 어떤 병명을 붙여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이것이 건강한 상태는 아님은 인식해야 한다고 느낀다.

장강명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