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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노동개혁 걸림돌 된 한국 노동귀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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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 전 노동부 장관

김대환 인하대 명예교수, 전 노동부 장관

여당과 제1야당의 대선후보가 확정된 가운데 민주노총이 오는 13일 전국노동자대회를 예고하고 있다. 지난달 20일의 소위 ‘총파업’에 이어 이달 초 4일간의 ‘순회투쟁’을 거쳐 ‘정치투쟁’ 수순을 밟고 있다.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투쟁은 이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문재인 정권의 비호 아래 세력을 확장해 제1 노총 지위에 오른 민노총이 내걸고 있는 핵심 의제에서 국방 예산 감축과 미군 철수, 주택 50%의 국유화 같은 대목에 이르면 아연실색할 정도다. 그들만의 정치투쟁이 유발하는 국민 분노가 도를 더해가고 있다.

국민 우려 무시하고 또 정치투쟁
대선 후보, 노동개혁안 제시해야

이미 코로나19로 인해 전 국민이 불편을 감내하고 자영업 폐업이 속출하고 있는 마당에 정부의 자제 권고에도 불법 정치파업을 감행한 민노총에 대한 국민의 시선은 싸늘하다. 대학가에는 민노총을 ‘민폐 노총’으로 비판하는 대자보가 일제히 나붙었다. 직접 피해를 본 자영업자들은 대학생들에게 “절대 자영업은 선택하지 마십시오”라고 절규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그동안 노조에 동조해왔던 민주 시민마저도 민노총을 ‘귀족 노조’라고 손가락질하고 심지어는 해체를 요구하기에까지 이르렀을까.

그런데 여기서 분명히 짚을 점은 귀족노조란 말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민노총이 대체로 고임금과 고용안정 등 우월한 근로조건의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조로 구성됐다고 해서 언론은 귀족노조라 부른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어법이 아닐 뿐만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용어다. 엄밀하게 볼 때 귀족노조는 존재할 수 없고, 다만 노동귀족(Labour aristocrats)이 있을 뿐이다. 이는 학문적으로 정립된 개념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시사점을 준다. 문제는 민노총 자체라기보다 정치 활동과 파업, 그리고 불법과 합법을 구분하지 않는 투쟁 위주의 집행부에 있다.

민노총이 정상적인 노동운동의 궤도를 이탈한 일차적 책임은 이 집행부에 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할 책임이 있는 정부와 정치의 잘못도 이에 못지않다. 문 정권이 민노총의 불법과 폭력을 용인해왔고 노조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도 묻지 않은 탓이 크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의 불법 점거, 현대차 울산4공장 노조원의 전주공장 노조 간부 폭행, 김포 택배 대리점주를 죽음으로 몰고 간 집단 괴롭힘 등 민노총의 불법행위는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도 정부는 물론 민노총 집행부는 사태를 방치하거나 조장하고 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면서 문 정권이 애써 외면해온 노동개혁의 절박성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노동개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혁파 역시 민노총의 기득권 철옹성을 허물지 않고서는 이루기 힘들다. 대체로 대기업과 공공부문의 노조로 이루어진 민노총이 진입 장벽을 쌓아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물론 노동시장에 새로이 진입하고자 하는 청년들을 주변부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추동해온 노동귀족을 제대로 견인해 나가야만 노동개혁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영국의 노동귀족이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하며 정치적으로는 대중보다 온건하다고 했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노동귀족은 사회적 존경은커녕 정치적으로 극단적이어서 문제다. 특정 정파에 치우친 전투적 민노총 집행부를 제대로 견인하기 위해 먼저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불법이나 폭력과 같은 일탈 행위에 대해 정부가 법과 원칙에 따라 엄중하게 대처하는 것이다.

물론 이는 기본 중의 기본에 지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노동귀족의 일탈 행위를 사전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이 필요하다. 필자는 이에 대한 복안을 갖고 있다. 강력한 노동개혁 의지로 무장한 정부가 등장하고 나름의 조건이 충족될 때에 책임 있는 당국자에 전달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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