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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박정환의 말, 신진서의 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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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일러스트 김회룡

일러스트 김회룡

2021 삼성화재배 결승 대결이 신진서 9단 대 박정환 9단으로 결정되었을 때 신진서의 우승을 의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더구나 1국을 신진서가 무난히 승리한 뒤엔 그의 우승이 결정되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승부는 예상을 철저히 빗나가며 박정환의 2대1 승리로 끝났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평생 승부를 지켜보며 살았지만 이번처럼 놀란 적은 없었다. 신진서는 세계대회서 17연승 중이었고 그 앞을 가로막을 자는 없어 보였다.

지난해 5월 말부터 12월 초까지 박정환은 신진서에게 12연패를 당했다. 두 번의 결승전에서 5연패. 그리고 남해 7번기에서 7연패. 박정환은 혹독하게 당했다. 다시 일어설 힘이 남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 남해 7번기는 문제가 있었다. 신진서와 박정환은 중국과 맞설 한국의 쌍두마차인데 굳이 이벤트까지 만들어 한쪽을 무너뜨려야 되겠느냐 하는 우려도 잇달았다. 아무튼 이 12연패는 ‘박정환은 신진서에게 안된다’고 각인해준 사건이었다. 신진서는 21세, 박정환은 28세라는 나이도 떠오르는 해와 지는 해라는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박정환이 연패의 와중에서도 “바둑을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말한 점이다. 그는 분노하거나 낙심하는 대신 조용히 ‘배움’을 토로했다. 승부사들이 종종 쓰는 표현이긴 하지만 이상하게도 박정환의 입에서 나온 배움이란 표현은 담담하게 가슴을 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는 이번 삼성화재배 결승전에서 제2국을 승리하여 1대1이 된 후 다시금 배움을 얘기했다. 7년 후배를 상대로 하기 힘든 표현인데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 중국의 일인자 창하오는 이창호에게 연전연패를 당해 계속 추락했다. 하지만 바닥에 이르자 창하오는 홀연히 깨달은 듯 다시 일어섰고 기어이 이창호를 꺾고 세계대회 우승컵을 손에 쥐었다. 창하오는 훗날 “바닥까지 떨어지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고 술회했다. 박정환도 연패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던 것일까.

돌아보면 결승 3국은 “순식간에 끝났다”고 표현할 수 있다. 신진서는 무언가에 쫓기듯 승부를 서둘렀고 중반 무렵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다. 중국 2위 양딩신은 과거 신진서를 이긴 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진서의 AI 연구는 다른 기사들보다 확실히 낫다. 기억력도 나보다 몇배이고 종반 계산력도 강하다. 그런데 나와 둘 때마다 한 번의 전투로 끝내려는 경향이 있다. 왜 스스로 무너지는지 모르겠다.”

그 말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이번 삼성화재배 준결승전에서 양딩신을 맞은 신진서는 끝끝내 잘 참았고 미세하게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승리를 거머쥐었다. 마라톤 같은 멋진 승부였다. 그에 비교할 때 박정환과의 결승 3국은 너무 허망했다. 신진서는 더욱 허망할 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연속 결승에 올랐으나 두 번 연속 스스로 무너졌다. 할 말을 잃었다. 아무도 그에게 패인을 묻지 않았다. 스승도 없이 혼자 커온 21살 신진서의 마음은 지금 어디로 표류하고 있을까.

신진서는 8년 전 처음 프로가 되었을 때 이런 소감을 말했다. “저는 바둑을 미칠 듯이 좋아한 적도 없지만 굉장히 싫어한 적도 없습니다. 바둑은 저에게 평범히 생활하는 것과 같습니다.”

13세 어린이의 말치고는 신기하다. 천재들은 상식의 잣대로 재기 힘들다. 그러므로 이번에도 신진서에게 어떤 위로나 충고도 하고 싶지 않다. 기본으로 돌아가라느니, 승부는 어차피 자신과의 싸움이라느니 하는 말도 다 부질없다. 그는 뼈아픈 패배로 상처를 입었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한다. 생활하듯 승부를 재개할 것이고 우리는 그걸 지켜볼 뿐이다.

신진서는 8일 벌어진 LG배 8강전에서 일본의 이치리키 료를 꺾고 한국기사로는 유일하게 4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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