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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번지수 잘못 짚은 한국식 뉴딜…시장부터 살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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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대통령의 경제 정책 무엇이 문제인가

이경태 전 OECD 대사

이경태 전 OECD 대사

일주일 전 노태우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그는 부분적으로 시행되던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모든 국민에게 전면 시행했다. 복지정책의 근간을 구축했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은 복지가 자신들의 업적이라고 자랑한다. 진보 진영은 반대 진영의 업적은 무시하고 복지는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선전한다. 노 전 대통령은 토지공개념도 도입했다. 택지소유상한제·토지초과이득세·개발이익환수제 등이다. 모두 위헌 또는 헌법 불합치로 끝나긴 했지만, 이를 두고 보수 진영이 사회주의적이라거나 위험한 발상으로 매도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문재인 정부는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해 분양가 상한제, 보유세와 거래세 증세 등 토지공개념 이념을 확대·강화했다. 진보 정부 4기를 이어가겠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부동산 불로소득 근절, 국토보유세, 부동산감독원 등 사실상 토지공개념을 앞세운 부동산정책을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를 두고 보수 진영은 사유재산 제도의 본질을 훼손하는 불온한 정책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루스벨트 뉴딜은 이념 문제 초월
같은 정책도 진영 따라 아전인수
실용 선택해야 복지·성장 다 잡아
보수·진보 모두 현실을 직시해야

보수 진영에 묻는다. 토지공개념의 최초 도입은 잘한 일이고 이를 확대·강화하는 것은 잘못 하는 일인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진보 진영에도 묻는다. 토지공개념이 토지의 사유를 부정하고 공유를 긍정하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건 진짜로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토지공개념은 수단에 불과

이경태의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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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경우에도 토지공개념은 부동산 가격의 안정을 위한 수단에 불과해야 한다. 부동산 부자들을 미워하고 불로소득을 죄악시하면서 토지공유야말로 정의라는 흑백논리·단순논리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접근하면 가격 안정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온갖 부작용만 양산한다. 지난 4년여 문 정부의 정책이 그렇지 않았던가.

노태우 정부는 주택가격 급등을 꺾기 위해서 분당과 일산 등 5개 신도시에 200만호의 물량 공세를 펴서 성공했다. 대규모 택지 개발은 또 다른 부동산 투기 붐을 일으킬 우려가 짙었는데 그 대책으로서 토지공개념을 도입하려고 했다고 본다. 공급 확대와 투기수요 억제를 패키지로 동원했다. 부질없는 이념적 접근으로 집값만 올리고 국민 편 가르기를 초래한 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어리석기 그지없다. 보수 진영 역시 시장공급 확대를 근간으로 하되 투기와 불로소득 억제를 위한 공개념적 보완책을 사회주의로 비하하는 색깔론은 버려야 한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를 끄는 뉴딜은 어떤가. 진보 진영은 루스벨트 대통령을 거듭 소환하고 있다. 디지털 정책에 뉴딜을 붙이고 기후변화 정책을 그린 뉴딜이라고 한다. 코로나 때문에 어려워진 경제를 살리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한다. 하지만 디지털 대전환, 지구온난화 대응은 코로나 이전부터 시행됐고 코로나 이후에도 지속해야 할 과제다. 루스벨트의 뉴딜이 사회개혁을 통해 미국의 자본주의를 한 단계 격상시킨 의미를 되살린다면 한국의 디지털 뉴딜, 그린 뉴딜 역시 코로나 위기 극복을 넘어서서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장기정책으로 추진돼야 한다.

이재명 후보도 뉴딜을 소환했다. 대공황 당시 루스벨트가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운 공산주의적·사회주의적 강력한 정책을 폈는데 이를 본받겠다고 말했다. 대공황 당시 미국의 소득세·법인세 최고세율을 92%까지 올렸고 과감한 복지·실업·일자리·세금 정책을 구사해 2차 대전 이후 50년 호황을 이끌었으니 루스벨트를 존경한다고 했다.

역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해석할 때 좀 더 신중해져야 한다. 자기 생각이 옳다는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아전인수 격으로 모자이크식 인용을 해서는 안 된다. 개별 사안을 거론하기에 앞서 앞뒤 사정과 맥락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미국 대공황과 한국 상황은 천양지차

무엇보다 대공황 당시의 미국과 현재의 한국은 처한 상황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대공황은 이름 그대로 미증유의 충격이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자유의 땅 미국을 공산주의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게 했으니 그 대책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어야 했다. 루스벨트는 공산주의자라는 오명을 무릅쓰고라도 자본주의의 구원투수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누구도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지 않는다. 미국식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점잖은 말로 비난하는 의견이 있을 뿐이다.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

92%의 세율은 대공황 대책이 아니고 전쟁 경제대책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꽃다운 나이의 젊은이들이 유럽 땅에서 죽어 나가는데 본토의 기업인들은 전시 특수를 누리면서 호강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세금으로 환수해야 한다는 정치적 여론몰이의 산물이었다.

한국도 지금 코로나로 어렵고 특히 자영업자를 비롯한 서민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공산주의적 정책을 펴야 할 정도로 정부가 나서겠다면 이는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은 것이다. 오히려 날로 사회주의적 색채가 짙어가는 방향성을 바꾸어서 자유시장 경제의 활력을 불어넣을 시점이다.

한국의 기업 자유는 루스벨트 시대에 비해 속박돼 있고 노동시장은 경직돼 있으며 정부는 더 크고 복지지출과 국가부채는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 차이를 무시하고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현실과 괴리된 정책을 밀어붙이면 루스벨트가 50년 호황을 가져온 것과는 반대로 한국경제의 50년 침체를 불러올 수 있다.

해답은 결국 좋은 일자리 창출

한국의 보수우파는 진정성을 가지고 서민경제를 걱정해야 한다. 아직도 자유시장 경제의 낙수효과를 전적으로 믿고 있다면 현실 문외한이다. 현재의 고용구조를 고치지 않으면 성장률을 끌어올려도 서민 생활은 개선되기 힘들다.

한국에서 1000만 명을 훌쩍 넘는 저임금소득자의 대부분은 비정규직과 영세자영업자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영세한 음식·숙박업 등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한국은 자영업과 영세 상공업체의 고용 비중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유난히 높다. 이는 산업생태계의 허리에 해당하는 중견기업의 위상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영세한 골목상권을 보호한다고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영업을 제한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대기업과 중견기업의 고용흡수력을 높이고 영세기업의 규모를 키우는 것이 저소득 해소에 효과적이다.

이 후보의 식당허가 총량제는 진단은 맞으나 처방은 틀렸다. 난립한 식당들이 과당경쟁 때문에 저소득의 온상이 되고 있으나 물리적으로 제한하면 허가받지 못하는 서민들은 어디로 가나. 추측건대 기본소득을 비롯한 복지 시혜를 베풀어서 이들을 구제하겠다는 발상으로 보이는데 대통령 후보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식당을 개업하지 않아도 되게끔 좋은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는 루스벨트의 테네시강 유역개발 계획(TVA) 같은 세금 쓰는 사업이 아니고 기업을 장려해서 세금을 거두어 가는 사업에서 나온다.

뉴딜 정책의 처음과 끝은 사회개혁

미국 대공황이 1929년 발생했고 루스벨트 대통령은 1933년 취임했다. 그는 구제(Relief)·회복(Recovery)·개혁(Reform)으로 집약되는 뉴딜정책을 시행했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계획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시행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단기 고용시책의 상징이다. 국가산업부흥법과 농업조정법은 생산과 가격조정을 위한 담합을 인정해 과잉생산과 가격하락을 방지하고 기업·노동자·농민을 보호하려는 것이었는데 위헌 결정으로 무산됐다. 공공지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법인세와 소득세를 대폭 인상했고 글래스-스티걸법으로 상업은행의 투자업무를 금지하여 또 다른 금융위기를 예방하려고 했다. 또한 노동자들의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했다.

개혁의 핵심은 사회개혁이었다. 1944년 1월 연두교서에서 국민에게 고용·식량·주거·교육·보건을 보장해주고 기업에 부당한 독점경쟁 없이 경영하는 자유를 부여한다는 국정 의제를 발표했다. 이 선언은 정치적 자유를 보장한 영국의 권리장전과 비교되면서 경제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2의 권리장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뉴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미국이 대공황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2차 대전 중의 전시 특수와 전후의 보복소비 폭발 덕분이었다. 뉴딜은 대공황의 악화를 막았고 사회개혁을 통해서 국민통합에 기여했다. 미국 경제는 전쟁 후 1974년 제1차 석유파동까지 성장과 분배가 상생하는 황금기를 보냈는데, 루스벨트의 사회개혁이 크게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