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 칼럼] 부자 국민에서 가난한 국민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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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동네 사우나탕에서 인사를 나누면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조그만 기업을 경영한다기에 나는 "요즘 아주 어렵다지요"라며 의례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러자 그런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그는 근자의 불경기에 대단한 걱정과 불안을 표하는 것이었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중소기업 사장과 벌거벗고 나눈 얘기 중에 다음 몇 마디가 기억에 남았다.

*** 소비가 미덕, 흔전만전 쓰고보자

그는 요즘의 어려움이 'IMF 때'보다 심하다고 했다. 국제통화기금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을 터이나 우리 기억 세포에 IMF는 지긋지긋한 고통의 대명사로 새겨져 있다. 아무튼 그는 "그때 나라는 가난했어도 국민은 부자였는데, 지금은 국민이 가난해져서 큰일이에요"라며 안색을 흐렸다. '나라는 가난, 국민은 부자'라는 구분이 다소 생소하지만 그 말뜻은 알 만 했다. 외국 빚을 갚지 못해 온통 경제가 파산한다고 아우성이었으니 당연히 나라가 가난한 것이다. 그리고 외환 위기를 극복한 주요 요인의 하나가 민간 소비였으므로 당시 국민은 부자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사실이 그랬다. 써야 경제가 살아나니 되도록 쓰라는 것이 정부의 당부였다. 그리고 다소는 거기 힘입어 경제가 되살아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해석에는 점검이 필요하다. 그의 말에서 나라를 정부로 바꾸면 얘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업과 금융기관들의 외채 상환을 위해 중앙은행이 마구 외화를 풀다 보니 외환 보유액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재정은 제법 튼튼했었다. 해외 채권단과 IMF가 기업 장부를 열어 보고는 아연실색했으나, 정부 장부를 보고는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경기 진작과 구조조정을 위해 적자 예산을 편성하고 공적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 국가 채무가 왕창 불어났다. 그렇다면 위의 "나라는 가난했어도"를 "정부는 부자였어도"로 고쳐야 옳다.

외환 위기 직전 일인당 국내총생산이 1만달러를 돌파했으니 국민이 부자라는 관찰은 맞을지 모른다. 부자 국민이 가난한 국민으로 돌변한 이유를 그는 신용카드에서-신용 소비에서-찾았다. "절약은 물러가라, 소비가 미덕이다." 구호까지는 이해하겠으나 "낭비가 장땡이다, 흔전만전 쓰고 보자"로 발전한 것은 크게 잘못이라는 말이었다. 그 잘못의 여파로 신용 불량자가 3백50만명을 넘어서고, 그의 탄식대로 "국민이 가난해진" 것이다. 업계도 예외가 아니어서 물품 대금을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5%의 세금 공제 혜택을 받는 바람에 신용카드 전표 모으는 것이 자기 같은 중소기업 사장의 일이었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현금 판매보다 외상 판매가 더 좋다니 세상에 이런 희한한 일이…. 그러니까 위의 "국민은 부자였는데"는 "국민은 부자 행세를 했는데"로 고쳐야 옳다.

이제 그 거품을 빼야 한다. 빈자는 애초에 거품이 없고, 부자 행세를 했던 신용 불량자에게도 더는 거품이 없을 것이다. 문제는 부자의 거품, 아니 부자들이 좋아하는 부동산의 거품이다. 일주일에 1억원이 뛰는 강남의 집 값을 바라보며 환장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 고래들의 투전판을 바라보며 뱃속 편할 새우가 어디 있으랴. 30대 그룹 임직원의 67.2%가 부동산을 최고의 재산 증식 수단으로 꼽은 반면 예금과 적금은 11.5%에 불과했다. 은행 돈을 빌려 집 투기에 나섰으니 새우의 고래 행세는-부자 행세는-여전한 셈인가.

*** 부자행세 했던 신용불량자들

그저께 정부는 강력한 부동산 대책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안 잡히면 초강력 대책을 또 내놓겠단다. 강력이든 초강력이든 투기는 엄히 다스려야 한다. 그러나 퇴로는-투자 출구는-열어놓아야 한다. "투자할 데가 없어 돈에 곰팡이가 슬어도 투기는 안돼" 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지당한 말씀이더라도 오래가지 못한다. '언 발에 오줌'은 될지언정 '외밭에 거름'이 되기는 어렵다. 그 퇴로를 열어 곰팡이를 막는 것은 정치의 몫이다.

다시 사우나탕 대화로 돌아가 "정치가 문제예요"라는 그의 말을 처음에는 못 알아들었다. 웬 정치? 정치 자금이라도 뜯겼나? 그게 아니었다. "도대체 내일을 모르겠으니 공장 문을 닫아야 할지, 붙들고 있어야 할지 이런 걱정 때문에 잠이 안 와요." 정치여! 그를 편히 재워 국민이 가난해지는 것을 막도록 하라.

정운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