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불행한 역사 되새기자/정종욱 서울대교수ㆍ국제정치(논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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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소수교후의 과제>
이미 조금은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한소수교는 두나라의 관계 뿐 아니라 한반도와 주변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다.
독일의 통일에 비교하면 그 중요성이 왜소해 보일지 모르지만 소련이 한반도의 역사에서 차지해온 비중이나 지난날 우리와 소련의 관계를 고려하면 하나의 작은 기적과도 같은 엄청난 사건임이 틀림없다.
역사에서 돌발사건은 없는 법이다.
갑작스레 생겨난 것처럼 보이는 사건도 따지고 보면 역사의 흐름을 반영하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소수교도 그동안 축적되어온 한반도 안팎의 변화들이 만들어낸 결과이며 앞으로 다가올 더 큰 변화들을 예고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냉전시대의 단순논리로서는 풀 수 없는 고등 방정식의 상호의존적 국제정치의 새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한반도에서의 냉전은 소련을 정점으로 하는 북방동맹과 미국을 축으로 하는 남방동맹이 서로 대치하는 구조적 특징을 가졌다. 중요한 결정은 언제나 모스크바와 워싱턴에서 이루어졌으며 대화와 협상의 축도 실제로는 미국과 소련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한반도를 에워싼 냉전의 두꺼운 벽을 허무는 작업이 남북해빙에 앞서 미소관계와 한소관계의 변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했던 것도 이러한 냉전의 구조적 특징 때문이었다.
분단고착이니 사대주의니 하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우리가 끈질기게 북방외교를 추진해온 것도 냉전의 내벽을 헐기 전에 그 외벽을 무너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 주변의 국제질서는 냉전의 외벽들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네편,내편하면서 두개의 진영으로 나뉘었던 봉쇄정치의 시대가 지나가고 각자의 실리에 따라 서로 의존하고 협력하면서 동시에 갈등하고 견제하는 세력균형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한소수교는 적지 않은 파급효과를 초래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한중관계의 개선속도가 가속되어 빠른 시일안에 무역사무소 차원을 넘어 사실상 외교기능을 갖춘 연락사무소가 설치됨으로써 정경합일의 시대에 돌입할 것이 예상된다. 한중관계 정상화는 북한과 중국이 맺어온 특수한 관계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한소수교로 인해 북한이 견지해온 교차승인반대라는 원칙이 깨어진 이상 시간문제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일본과 수교교섭단계에 돌입함으로써 교차승인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북한과 미국의 관계 역시 이같은 주변의 흐름을 무시한 채 언제나 냉전의 유산속에 얼어붙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마디로 교차접촉과 교차승인의 시대가 생각보다 빨리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세력균형의 새 질서속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이 보장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남북간의 관계개선이 선행되지 못한 상태에서 주변의 세력들에 의한 균형과 견제의 정치가 본격화되면 한반도의 운명은 우리들 자신의 의사보다 주변 국가들의 이익에 따라 결정되는 불행한 결과도 결코 배제할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한소수교로 인해 한반도를 짓눌러온 답답한 냉전의 먹구름이 싹 가시고 밝고 희망찬 새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믿고 있지만 이것은 대단히 비현실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소련이 북한의 엄청난 반대를 무릅쓰고 우리와 수교하기로 결단을 내린 것만해도 나름대로 철저한 손익계산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외교는 결코 자선행위가 아니다. 외교에서 자선행위는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다.
소련의 손익계산서에는 최고 5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한국에서 공급될 경협자금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한반도와 동북아에서 전개될 새로운 세력균형의 정치판도에서 자신의 몫을 확보하겠다는 무서운 전략적 의도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소련은 제정러시아 때부터 한반도 주변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해왔다. 한말에는 청을 대신해 일본을 견제하려 했지만 1905년 로일전쟁의 결과로 패전국 러시아는 조선과 국교를 단절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난 통한을 갖고 있다. 또한 40년 후 2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승전국으로서 한반도와 그 주변에 모습을 다시 나타냈지만 38선과 휴전선 이북에서 발이 묶인 채 대륙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아쉬움을 갖고 있는게 바로 오늘의 소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소수교는 소련의 입장에서 보면 85년전의 숙원을 실현시킬 기반을 마련한 외교적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한소수교의 역사적 의의를 부정하고 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의 소련이 한말의 제정러시아도 아니며 오늘의 한반도 국제정세도 그 때의 상황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한소수교가 공동성명이 말하는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진정한 역사적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북방정책과 남방정책간에 조화를 이루고 이들 남북방정책이 통일정책과 연계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한소수교가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냉전의 유산인 대립과 고립의 낡은 껍질을 벗겨내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낡은 껍질에 대신할 평화와 협력의 새로운 껍질을 창출하는 일이 보다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세력균형의 새 시대에 우리의 이익을 지키고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키움으로써 한말의 불행한 역사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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