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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혁의 한반도평화워치

쿼드 참여 차단 말고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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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미·중 격돌과 한국의 대응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이혁 전 주베트남 대사

지난달 말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아프간이 더는 미국의 핵심 이익이 걸린 나라가 아니며, 미국 또한 세계 각 지역에 대한 과도한 관여(overstretch)를 줄이고 중국과의 대결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을 보여준다. 트럼프 행정부에서 시작된 미국 단독의 중국 때리기(China bashing)가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동맹국과 우호국을 끌어들이는 중국 포위 전략(China encircling)으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 전체에 반중 분위기가 고조되고 미국 정치에서도 중국과의 대결적 자세는 초당파적 흐름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1945)와 함께 미·소 냉전이 시작됐다. 미국은 1988~91년 옛 소련 붕괴 이후 오랜 기간 도전자 없는 단독 패권국 지위를 누려왔다.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닉슨 대통령이 1972년 교조적 공산주의 국가였던 중국을 방문하고, 79년 미·중 수교가 이뤄졌다. 또 미국이 중국을 국제사회에 편입시키는 노력을 주도하면서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한·미 동맹은 미국엔 선택의 문제이나 한국엔 생존의 문제
중국에 안보 굴복하면 한국 입지 좁아지고 동맹도 흔들려
대치 속 공존 찾는 미·중 간 ‘차가운 평화’ 당분간 계속될 듯
한·중·일 정상회의로 소통 강화하고 지역 긴장 완화해야

이제 그런 중국이 패권국 미국의 도전 세력으로 등장했다. 나폴레옹이 “중국을 잠자게 놔두라. 중국이 깨면 세계를 흔들 것이다”라고 말했으나, 미국이 중국을 깨워서 세계를 흔들게 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19, 20세기를 제외하고 세계 최강국이었던 중국의 재부상은 역사의 필연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군사·안보 우위 계속돼

이혁의 한반도 평화워치

이혁의 한반도 평화워치

패권국이 신흥 강국의 도전을 좌시하거나 스스로 패권을 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패권국은 무력·경제력·외교력 등 온갖 수단을 통해 도전국을 누르려 하며, 이것이 펠로폰네소스 전쟁, 1·2차 세계대전 등 전쟁의 참화로 이어졌다. 다행히 미·소 냉전은 인류에 궤멸적 참화를 가져올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중요한 억지력으로 작용하여 무력 전쟁 없이 끝났다. 소련은 군사 경쟁보다 경제·체제 대결에서 패해 무너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미·중 경쟁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 첫째, 미국의 군사·안보 우위는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다. 미국은 압도적 군사력(핵탄두 미국 5550개 중국 350개, 항공모함 미국 11척 중국 2척)을 바탕으로 동맹국과의 연대를 강화하면서 강력한 중국 포위 전선을 펼쳐 나갈 게 분명하다. 미국은 심지어 중·러 연대 강화를 견제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문제 등으로 악화한 러시아와의 긴장 상태를 완화할 조짐도 보인다.

중국도 미국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력을 증대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 발전에 들어갈 국가 자원을 대폭 줄여서 군비로 전용하기 어렵고, 전략적 부담 요인인 북한 외에는 강력한 동맹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은 우선 최대 무력충돌 위험지역(flashpoint)인 대만해협에서 미군에 승리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는 데 주력하고 있다. 특히 미·중 모두에 전략적 요충지인 남중국해를 둘러싼 양국 공방이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둘째, 중국은 10년 정도(2028~2032년) 지나면 미국을 제치고 최대 경제 대국 지위에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변이 없는 한 이 자리는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다. 이에 미국은 특히 컴퓨터·항공우주·반도체·통신 등 첨단 전략산업에서 대중국 우위를 지키기 위해 우방국들과 다양한 연합전선을 펼쳐갈 것이다. 다만, 미국의 노력이 중국의 경제 발전의 대세를 되돌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미국조차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통해 엄청난 이익을 누려 왔으며, 어떤 나라도 중국과의 무역·투자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중국은 14억 시장을 무기로 최대한 많은 국가가 중국과의 교역·투자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가도록 하며 고도 경제발전 흐름을 이어갈 것이다. 또 일대일로와 방대한 자금력을 활용한 선심 공세(charm offensive)를 통해 친중 국가를 늘리고 국제적 영향력과 활동 공간 확장에 노력할 것이다.

셋째, 현 중국 지도부의 정책을 볼 때 중국이 경제발전에 걸맞은 민주화 과정을 밟을 것이라는 기대는 상당 기간 하기 어렵다. 오히려 홍콩·신장위구르 사례에서 보듯 중국 지도부는 표현의 자유와 인권 증진에 대한 욕구를 차단하려 한다. 미국은 중국 인권상황에 대한 강력한 비판과 제재를 가하고 있으나, 중국은 미국이 소련을 붕괴시킨 계략을 중국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고 경계한다. 중국은 지금의 정치 체제가 중국의 안정과 발전을 담보하는 가장 효율적 시스템이라고 주장하고, 트럼프 정권에서 보듯 서구적 민주주의는 많은 문제를 노정하면서 퇴보하고 있다고 반박한다. 미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하는 서구적 가치를 표방하는 반면, 중국은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할 수 있다는 동양적 가치를 대변하는 일종의 문명 충돌적 대결이 전개되고 있다.

한국은 미·중 대결의 파고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첫째, 한·미 동맹 견지와 강화가 지상 명제이다. 북한과 대치하는 남한이 놀라운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토대가 된 한·미 동맹은 미국에는 선택의 문제이나 한국에는 생존의 문제이다. 따라서 한국은 굳건한 한·미 동맹을 위해서는 비용이 수반되더라도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국 배치 사례에서 보듯 중국은 한·미 동맹 강화 노력에 대해 반발하고 필요하면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안위가 걸린 분야에서 중국의 요구나 협박에 굴복하거나 타협하면 우리가 중국과 당당한 관계를 만들어갈 여지는 더욱 좁아지고, 한·미 동맹의 근간도 크게 흔들린다. 아무런 비용을 치르지 않고 나라의 안전과 발전이 보장될 수 있는가.

틀어진 한·일 관계 ‘정상화’ 시급

지금 바이든 행정부는 양자 동맹과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쿼드(미국·일본·인도·호주 4개국 회의체) 등 전략적 자산을 총동원해 대중국 연합전선을 펼치고 있다. 물론 우리의 국력과 지정학적 상황을 고려할 때 한국이 한반도를 넘어 중국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미국은 한국에 쿼드 참여를 강하게 요구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한국은 쿼드 참여 가능성을 차단하지 말고 동북아 상황 전개 추이를 보면서 전략적 자산으로 활용해 가는 게 현명하다.

그리고 한·미, 미·일 동맹을 통한 한·미·일 삼각 안보협력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일그러진 한·일 관계를 조속히 회복해야 한다. 동시에 중국이 북한 후견국으로서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 북한 핵 문제 등과 관련해 중국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대화와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등 중국과의 신뢰 구축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 미국이 경제·산업 분야에서도 우호국들과 협력해 중국에 대항하고 있는 현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첨단 전략기술 경쟁이 미·중 대결의 승패에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이 분야 경쟁에서 미국이 중국에 밀리면 민간 산업뿐 아니라 첨단무기 경쟁에서도 우위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영국·독일·일본 등 동맹국에 중국 화웨이의 5G 설비를 도입하지 말도록 강하게 압박한 대목에서 미국의 중국에 대한 경계심이 단적으로 확인된다.

미국이 최근 한국 기업의 반도체 공장을 유치하려는 노력에서도 미·중 경쟁의 단면을 볼 수 있다. 한국은 향후 중국과의 경제 관계에서 일정한 제약을 받을 것이나, 동시에 우리가 미국·일본·유럽 기업들과 전략적 제휴를 확대할 여지도 커졌다. 반도체·통신·AI 등 첨단 분야뿐 아니라 건설·제조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가 서방과 연계·협력한다면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의 최대 무역 상대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는 민간 기업의 중국 시장 개척을 위한 좋은 외교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 중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미·중 경쟁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격화되지 않도록 외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중·일 정상회의 등을 통해 동북아 3국 간 소통을 강화하여 지역 긴장을 완화하고, 보다 미래지향적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한 창의적 역할을 해나가야 한다.

친미·친중 분열 상황 극복해야

지난주 바이든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통화에서 미·중 경쟁이 분쟁(conflict)으로 비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했다. 양국 간 전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전쟁은 양측 모두에게 재앙적 참화를 가져온다. 세계 경제의 상호 의존성은 더욱 커지고, 기후변화 등 미·중이 공동 대처해야 할 문제도 많다. 따라서 미·중 간에는 미·소 냉전(Cold War)과 같이 승자·패자가 분명히 가려지지 않은 채 경쟁·협력·긴장 속 공존이 병행되는 ‘차가운 평화(Cold Peace)’ 시대가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미·중 경쟁에서 한국처럼 복잡하고 민감한 지정학적·지경학적 위치에 있는 나라도 드물다. 시대 흐름을 냉철하게 판단하고 국익 위주 외교를 전개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의 길이다. 친미·친중으로 나라가 분열되는 상황을 극복하고 국익 우선의 초당적·국민적 합의를 이루어 창의적·전략적 외교가 가능한 튼튼한 기반과 넓은 공간을 확보하는 게 시대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