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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현질’ 도를 넘었다”…충성유저 ‘린저씨’마저 등돌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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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3호 06면

[SUNDAY 추적] 엔씨소프트 주가 급락 사태 

이쯤 되면 기업도 투자자도 공황상태다. 게임 업체 엔씨소프트 얘기다. 지난달 25일까지만 해도 83만원대였던 이 회사 주가는 불과 1주일 사이 24% 급락하면서 이달 초 63만원대가 됐다. 이후 더 하락해 10일 현재 7개월 전 연고점 대비 43% 내려간 60만원대를 형성했다. 엔씨소프트는 히트작 ‘리니지’로 국산 단일 게임 첫 100만 회원 돌파(1999년), 첫 누적 매출 3조원 돌파(2016년) 등 전례 없는 기록을 달성한 회사다. 역대 리니지 시리즈 지식재산권(IP)에서 발생한 누적 매출만 10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1000만 관객 영화 70여 편이 나올 때 매출 합계다. 잘나가던 이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주가 급락은 지난달 26일 새 모바일 게임 ‘블레이드&소울2’를 출시하면서 시작됐다. 이 게임은 사전 예약에 746만 명이 참여할 만큼 하반기 최대 기대작으로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출시 직후 혹평이 쏟아졌다. 이 게임은 리니지 같은 MMORPG(여러 이용자가 동시 접속해 같은 가상공간에서 특정 역할을 수행하며 즐기는 게임) 장르이면서 리니지의 수익 모델인 과금(이용료 결제) 유도 시스템을 무늬만 살짝 바꿔 계승했다. 예컨대 게임 속 전투에서 상대를 이기기 위해선 더 좋은 무기 등의 아이템이 필요한데, 현실 세계의 돈을 많이 쓸수록 좋은 아이템을 뽑을 확률이 오르게끔 게임을 설계했다.

“리니지M 캐릭터에 1억 써도 하수”

이를 ‘확률형 아이템’이라 한다. 결국 “리니지와 다른 게임이라고 홍보하더니 또 ‘현질’(게임을 위한 돈쓰기) 유도냐”는 이용자들의 거센 반발에 주가가 하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주가 급락을 설명하긴 힘들다. 지금의 ‘으리으리한’ 엔씨소프트 사옥(경기도 판교)을 세운 것은 이른바 ‘린저씨’(리니지 하는 아저씨)로 불리는 리니지 시리즈의 열성팬이기 때문이다. 즉, MMORPG 장르나 과금 유도 시스템은 충분히 검증된 인기 요소라는 얘기다. 당연히 회사 입장에선 이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린저씨마저도 이번 신작에 분노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껏 참고 참았지만, 문제점을 개선하기는커녕 도가 지나치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린저씨를 자처했던 직장인 임모(44)씨는 “확률형 아이템을 통한 부분 유료화 자체는 낯설지 않은 일이라, 그래도 적정 수준이면 이 회사 게임에서 손을 뗄 생각까진 안 했다”며 “문제는 회사 수익성 강화를 위해 현질의 ‘진입장벽’을 일반인 수준에선 감당조차 못할 정도로 높인 것”이라고 말했다. 린저씨 사이에선 2017년 엔씨소프트가 출시한 모바일 버전의 리니지 게임 ‘리니지M’이 인기를 모으면서 이런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들끼리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경험을 공유하면서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었다. 리니지M에서 캐릭터에 1억원을 썼는데도 ‘혈맹’(리니지 세계관 내에 형성된 이용자 모임) 내에서 아무 역할도 못하는 하수(下手)더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최소 10억~30억원 정도는 써야 캐릭터의 전투 성능이 좋아져 다른 혈맹과 싸울 때 중간급 역할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더라는 거였다. 아울러 50억~70억원은 써야 혈맹 내에서 핵심 인물로 통할 수 있고, 다른 혈맹에서도 우러러보는 높은 위상의 고수(高手)가 되려면 100억원 이상은 써야 한다는 게 이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최모(47)씨는 “과거 PC 버전 리니지에서는 현질을 안 해도 (게임 하는 데에) 시간을 많이 투자하거나, 손놀림이나 머리 쓰는 데 재능이 있으면 남들이 박수칠 만큼 캐릭터를 강하게 키울 수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오직 현질로 캐릭터를 치장해야만 그게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김택진 대표

김택진 대표

2019년 ‘리니지2M’ 출시 이후에도 이런 얘기는 계속 나왔다. 린저씨들은 엔씨소프트의 연간 영업이익 등 실적 수치와 주가가 최근 몇 년간 가파르게 오른 게 이처럼 이용자의 현질 수준을 대폭 높였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현질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우수한 확률형 아이템이 뽑힐 확률을 웬만큼 돈 써서는 어림도 없을 만큼 극단적으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문에 “리니지가 도박과 다를 게 없다”는 지적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정치권에서도 공론화될 정도였고, 급기야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는 2018년 국정감사에 불려 나갔다. 당시 김 대표는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 “아이템이 공정하게 이용자 사이에서 나뉘는 데 필요한 기술적 장치”라고 밝혔다. 다만 엔씨소프트는 리니지 시리즈의 확률형 아이템이 회사 수익에는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전체 확률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등은 아직도 공개하지 않고 있다(확률은 일부만 공개).

“미국·유럽선 안 통하는 사업 모델”

설상가상으로 최근 들어 리니지에 대한 현질을 악용한 사기 범죄와 피해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7월 인천서부경찰서에 따르면 A씨 등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리니지M 계정 판매자를 찾아 거래하자고 한 다음, 휴대전화로 발신번호가 조작된 허위 ‘입금완료’ 문자 메시지를 발송하는 수법으로 70명으로부터 18억원 상당의 계정을 가로챈 혐의로 검거됐다. 현질로 무장해 강력해진 게임 캐릭터 계정을 현실 세계에서 사고파는 일이 빈번하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앞서 4월엔 리니지M 내에서 통용되는 사이버 머니인 ‘다이아’를 판매한다고 속인 뒤 4명에게 거액을 챙긴 B씨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가뜩이나 기업 이미지가 나빠진 엔씨소프트로선 달갑지 않은 사건들이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 같은 일들을 겪으면서 엔씨소프트라는 회사 전반에 대한 시장의 의구심이 커진 게 최근 주가 폭락의 실체라는 게 시장의 진단이다. 정호윤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확률형 아이템 등 리니지의 성공 방정식에 대한 이용자들의 피로감과 불만이 누적된 상황이라는 게 이번 신작을 통해 재차 드러났다”며 “결국 주가 폭락도 신작 하나에 대한 실망감보다는 회사의 미래에 대한 의구심이 커진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과적으로 엔씨소프트가 주가 반등을 이끌려면 린저씨마저 등을 돌린 기존 성공 방정식에서 벗어난 게임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는 비단 엔씨소프트만의 문제가 아니라 K게임이 안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리니지의 인기에 영향을 받은 많은 국내 게임사들이 비슷한 MMORPG 장르와 과금 유도 시스템의 게임 개발·출시에 여전히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넥슨의 인기 게임 ‘메이플스토리’, 카카오게임즈의 최근 히트작 ‘오딘’ 등도 리니지처럼 확률형 아이템을 기반으로 한 게임이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은 “중국과 일본은 게임 속 확률형 아이템의 도박성이 해가 된다며 규제하고 있고, 미국·유럽 시장에선 확률형 아이템은 아예 통하지 않는 사업 모델”이라며 “확률형 아이템이 주는 국내 단기 수익에 중독된 기업들이 체질 개선에 힘쓰지 않는 한, K게임은 장기적으로 국내에서 외면되는 건 물론이고 글로벌 경쟁에서도 도태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게임 개발 노력 없이 ‘헤비 과금러’에 의존하다 역풍

가상공간인 게임 속 캐릭터 하나를 키우는 데 실제로 수십억원을 쓴다. 아무리 수중에 돈이 많은 린저씨더라도 리니지 하나에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경험자들은 “리니지만이 주는 중독적 쾌감이 상상을 초월하다보니 과금을 멈출 수 없다”고 전한다. 사업가 박모(51)씨는 “가상공간이지만 내 혈맹 구성원들을 진두지휘하면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다른 혈맹에 피해를 입히면서 때론 거리낌 없이 내 입맛대로 ‘갑질’까지 하며 얻는 쾌감은 경험해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이런 지위를 놓지 않기 위해선 계속 많은 돈을 써서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게 박씨의 설명이다. 한국게임산업개발원에 따르면 국내 리니지 이용자 7018명은 주당 평균 31시간(하루 4~5시간)씩 이 게임을 했다. 다만 최근엔 리니지를 떠나는 이용자도 늘고 있다. 리니지 속 한 혈맹의 리더 역할까지 했다가 최근 게임을 접은 송모(41)씨는 “아이가 생기고 코로나19에 사업도 잘 안 되다보니 리니지에 이렇게까지 열중해서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 역시 더 이상 이들 헤비 과금러에만 의존하기 힘들 만큼 여론 악화에 직면했다. 지난 4월엔 린저씨들이 엔씨소프트 사옥과 국회의사당 등을 도는 트럭 시위로 회사 측을 규탄하는 일도 있었다. 스탠리 양 JP모건 애널리스트는 “엔씨소프트는 혁신적인 게임 개발 노력 없이 지나친 과금 유도로 이용자 신뢰를 잃었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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