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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등에 철심 박고 뛴 울보 염혜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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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손등에 철심을 박은 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염혜선. [사진 국제배구연맹]

손등에 철심을 박은 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염혜선. [사진 국제배구연맹]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4강 ‘토스’
“주전으로 일본 꺾고 눈물 펑펑”

한국 여자배구는 도쿄올림픽에서 드라마 같은 승부를 이어갔다. 세터 염혜선(30·KGC인삼공사)이 투혼을 불사르며 대표팀의 4강 진출을 ‘토스’했다.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팬들에게도 염혜선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올림픽이었다.

염혜선은 지난 2월 블로킹 훈련 중 심하게 다쳤다. 오른 약지 뼈가 튀어나오면서 인대가 끊어졌고, 손등 골절상을 당했다. 수술대에 오른 그는 “세터에겐 손이 생명이다. 손의 감각도 중요하다. 그래서 걱정됐다”고 돌아봤다.

염혜선은 태극마크를 위해 복귀를 서둘렀다. 손등에 박은 핀을 제거하면 복귀가 더 늦어져 철심이 박힌 채 뛰었다. 통증이 상당했지만, 참고 견뎠다. 염혜선은 “볼을 만지면 안 되는 시기에 훈련했더니 처음에는 손이 구부러지지도 않더라. 아팠지만 (올림픽 전초전인) 5~6월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기량을 보여주지 못하면 대표팀에 뽑히지 않을 수 있었다. 스스로 ‘괜찮다’고 주문을 걸며 공을 만졌다”고 회상했다. 그는 “VNL에서 부진해서 올림픽 최종 명단에 뽑히지 않을 줄 알았다. 혼자 눈물도 흘렸다”고 말했다.

손등에 철심을 박은 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염혜선. 이형석 기자

손등에 철심을 박은 채 도쿄올림픽에 출전한 염혜선. 이형석 기자

주변에서도 올림픽 출전을 만류했다. “그런 몸 상태로 뛸 수 있겠나” “올림픽에서도 다칠 수도 있다”는 걱정이 쏟아졌다. 그를 짓누른 부담은 또 있었다. 학교폭력 논란으로 국가대표 자격을 잃은 ‘주전 세터’ 이다영의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었다. 염혜선은 “사실 스트레스를 받긴 했다. 하지만 세터는 욕먹는 위치다. 난 특히 그랬다. 이 악물고 조금만 더 보여주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목포여상 2학년 때 국가대표로 발탁된 그는 2008년 전체 1순위로 프로에 입단한 기대주였다. 2016 리우올림픽 대표팀에도 뽑혔지만, 본선에선 벤치만 지켰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 체제에서도 그는 이다영의 백업이었다. 염혜선은 “지난해 1월 태국에서 열린 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을 뛰었다. 정말 힘들게 올림픽 티켓을 땄는데 도쿄에 가지 못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다”고 돌아봤다.

결국 주전 세터가 된 올림픽에서 총 223개의 세트(토스)를 성공하며 이 부문 4위에 올랐다. 서브는 공동 3위(8개)를 차지했다. 염혜선은 예선전에서 일본을 세트스코어 3-2로 꺾고 한참 동안 눈물을 쏟았다. 그는 “원래 잘 울지만, 라커룸에 들어갈 때까지 눈물을 흘린 건 처음이었다. 예상을 뒤엎고 8강을 확정한 경기였다. 또 주전으로 뛰며 일본을 처음 꺾은 기쁨이 워낙 컸다”고 돌아봤다.

염혜선은 배구인 가족 출신이다. 할머니와 부모 모두 배구를 했다. 1남 2녀 중 장녀인 염혜선은 “손이 작고 팔도 짧아서 초등학교 때 배구를 그만두려 했지만, 부모님은 듣는 척도 안 하셨다. 요즘엔 칭찬과 응원을 많이 해주신다”며 웃었다.

그는 “(김)연경 언니는 모두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리더십을 지녔다. 하나부터 열까지 본받아야 한다. 언니의 승부욕은 진짜”라고 인정했다. 라바리니 감독에 대해서도 “전술적, 심리적으로 정말 좋았다. 내가 하고 싶은 플레이를 하도록 해줬다”며 고마워했다.

염혜선은 “도쿄올림픽을 통해 내 배구 인생을 돌아봤다. 그동안 트레이드와 보상 선수로 팀을 옮기면서 힘들었다. 참고 견디니까 올림픽에서 4강까지 왔다. 앞으로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한번 해보자’고 다짐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김연경, 양효진, 김수지 등) 언니들의 마지막 올림픽을 함께해 영광이었다.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KGC인삼공사에서도 이 기운을 이어가 ‘봄 배구’를 하고 싶다. 8년 만에 세터상도 받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 올림픽 4강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6개월이었다. 최고의 순간을 함께한 손등뼈의 핀은 곧 제거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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