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탈 문화재(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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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05년 가을 수학여행이란 명목으로 한국에 와 각 지방의 고대역사유적을 답사하며 유물실태를 조사했던 동경제대 대학원생이 한사람 있었다.
그는 경주 남산에서 신라시대의 기왓장과 토기,석불의 파편 등을 채집하는 한편,서천왕사 근처에서는 보상화문이 새겨진 전돌과 10여장의 기왓장을 주워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5년 뒤 이런 여행기를 썼다. 『소생이 여행할 당시는 도굴이 끊임없이 행해져 그 발굴품은 모두 일본인 상인의 손에 들어가고 있었다.
고분속에서 꺼내진 유물들이 부산과 대구에 나와 있어 소생은 비교적 좋은 것을 구할 수 있었다. 작년(1909년)에는 대구에서 그런 발굴품이 고물상에 적취함을 보았다.』
이 글을 쓴 장본인은 다름 아닌 이마니시(금서 룡)로 뒤에 경성제대교수로 있으면서 한국고대사에 관한 많은 저술과 논문을 발표한 사람이다.
이 이마니시의 기록은 1905년께 이미 개성ㆍ경주 지방의 도굴이 착수되었으며 그 도굴품들은 모조리 일본인 골동상 수중에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1909년께는 도굴된 유물들이 일본인 골동가게에 산적해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는 1920년대에 이미 송산리 고분 1호에서 5호까지 몽땅 도굴되고 있었다.
이 무렵 공주의 모중학교 교사로 있었던 가루베(경부자은)란 사람은 백제고분을 연구한답시고 여우처럼 무덤을 파헤쳐 부장품을 챙겼다.
그는 일제패망 뒤 한 트럭분의 백제유물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후에 『백제 미술』 『백제유적의 연구』 등의 저서를 내고 「백제통」 임을 자처한 파렴치한 인물이다.
지금도 공주의 고로들은 무령왕릉 앞 왼쪽에 붙어있는 제6호 고분을 도굴한 자가 바로 가루베였다는 사실을 여러 증거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 오늘날 일본에서 한국고대사의 연구가니 무슨 컬렉션이니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마침 한 일본인 골동품 수집가게에서 빼앗아 온 우리 문화재의 일본 반환판결이 났다.
강탈해온 것이니 주인에게 돌려주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문화재의 원주인은 우리고 또 당사자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한때 그것을 한국에 반환하겠다는 말도 했다. 그런 마당에 지금 그대로 돌려준다는 것은 어딘가 한가닥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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