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병 전 감자 뜻 비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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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2003년 11월 20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외환은행 이사회. 검찰은 이날 회의 내용을 토대로 외환은행이 외환카드 주가를 조작했다고 판단하며 엘리스 쇼트 론스타 부회장 등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이날 이사회에 참석한 사람은 의장을 맡은 이달용 외환은행장 직무대행과 엘리스 쇼트 론스타 부회장, 스티븐 리 당시 론스타코리아 대표, 유회원 론스타어드바이저코리아 사장, 마이클 톰슨 론스타펀드 아시아지역 법률고문, 유희선 전 수출입은행 이사, 이수길 전 한국은행 조사부장 등 7명이다.

이사회 의사록에 따르면 이 의장이 외환카드 합병의 필요성을 말한 뒤 합병비율 등에 대해 말을 꺼냈다. 이에 A이사가 "합병을 발표하면 외환카드의 주가는 상승하고 외환은행의 주가는 하락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합병 전에 감자(減資)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감자를 고려하고 있다고 시사하는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어 B이사가 "시장에 보다 긍정적인 인식을 줄 수 있도록 … 더 나아가 감자도 고려하고 있으며, 외환카드사에 대해 유동성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부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보탰다.

이 의장은 "감자를 포함한 합병방안 등을 마련해 추후 이사회의 승인을 받도록 하고 세부사항은 집행부에 위임해주시면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란 말로 회의를 끝냈다.

◆ 검찰 "주가 조작 분명"=검찰은 "주가 상승을 막기 위해 감자를 고려하고 있다고 시사하자"는 이사회 의사록 발언이 주가 조작의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한다. 이사회를 앞두고 증시엔 외환카드 감자설이 퍼지면서 11월 10일 7330원이던 외환카드 주가는 20일 4280원, 26일 2550원으로 주저앉았다. 이어 28일 외환은행은 감자 없이 은행과 카드의 합병을 결의했다. 외환카드 2대 주주인 올림푸스의 지분은 주당 5030원에 인수하고 소액주주의 주식매수청구가격은 4004원으로 정하는 내용이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론스타 측 인사가 주도하는 외환은행 이사회가 감자설을 시사하고 이후 주가가 내리자 감자 없이 합병해 수백억원의 합병 비용을 줄인 셈이다.

◆ 론스타 "정부 압박으로 외환카드 구제했다"=론스타의 존 그레이켄 회장은 1일 검찰 수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당시 외환카드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로 지불 불능 직전 상황이었다"며 "감자는 시장에서 이미 예견됐던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론스타는 (한국의) 은행 감독 당국의 강한 압박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외환카드 구제를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며 "한국 검찰의 주장은 모두 거짓이며 뒷받침할 근거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론스타 관계자는 "감자를 통한 합병안을 검토했으나 거액의 단기 채무 만기일이 다가오는 등 상황이 워낙 급박해 지분 인수를 통한 합병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최준호 기자

◆ 감자와 합병='감자'는 적자 등으로 회사 재산이 자본금보다 적을 때 이 같은 장부상 손실을 메우려고 자본금을 줄이는 조치다. 회사가 경영 악화로 법정관리에 들어가거나 다른 회사에 합병될 때 일정 비율로 지분을 없애 기존 주주의 책임을 묻는 식으로 이뤄지는 절차다. 감자설이 나돌면 보통 주가가 하락한다. 또 합병할 때는 두 회사의 합병 당시 주가 등을 기초로 합병 비율이 결정된다. 그래서 외환은행은 외환카드와 합병하기 전 외환카드의 감자 가능성을 시사해 주가를 떨어뜨린 뒤 외환은행에 유리한 비율로 합병을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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