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염치 없는 여당 신장개업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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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95년 김대중씨 정계 복귀와 함께 새정치국민회의 창당. 2000년 김대중 대통령, 새천년민주당으로 재창당.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열린우리당으로 분당. 그렇다면 이 계보를 이어받아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맞설 정당은? 아마도 '지역화합-민주평화개혁-새 출발'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정당이 등장하지 않을까?

대선을 앞두고 멀쩡한 정당의 간판을 내리고 신장개업하는 일은 우리 정당정치의 오랜 구습이다. 141명의 현역 의원을 거느리고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집권당이지만, 열린우리당은 요즘 재창당론.리모델링론.호남회귀론 등으로 소란스럽다. 물론 지지도가 10%대를 맴돌고, 국민지지도 10%를 넘는 대선 후보 한 명도 보유하지 못한 정당으로서 신장개업이라도 해야만 하는 절박한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지만 안에서는 정치적 화장에만 몰두하고 있는 딱한 모습도, 정당의 존재 이유가 권력 장악에 있다는 점에서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열린우리당에서 진행되는 신장개업론은 책임있는 집권세력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요건 세 가지를 결여하고 있다. 염치.책임의식.현실감각의 결핍이 그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염치의 결핍. 100년 이상 지속될 것이고 20년 장기집권이 가능한 어마어마한 정당을 건설한다는 호언장담은 간데없고, 오늘날 열린우리당은 호남 유권자에 대한 구애에 나서고 있다. 지역주의는 퇴행적인 것이어서 이를 극복하는 탈지역주의 정당을 구축한다던 대담한 계획은 실종되고, 호남을 끌어안아 새로이 정당을 만들겠다는 구상은 보통사람들의 상식과 염치의 한계를 넘어선 생각이다.

이는 염치의 문제를 넘어선 문제이기도 하다. 호남에 대한 구애 과정에서 발생하는 엉뚱한 문제는 햇볕정책의 재조정이 더욱 꼬이는 데에 있다. 마치 호남 시민들은 햇볕정책의 무조건적인 지지자인 양, 열린우리당은 '햇볕정책 구하기'에 전력 투구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화 과정의 고비마다 큰 역할을 해왔던 호남 시민들을 햇볕정책의 무조건적 지지와 등치시키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수의 시민들처럼 호남인들 역시 북한 핵실험 이후 신중하면서도 단호한 햇볕정책의 미래상을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지역화합은 내년 대선에서도 변함없는 핵심 화두가 되겠지만 단세포적인 호남 회귀와 햇볕정책의 무조건적인 사수로는 지역화합에 다가갈 수 없다.

둘째, 책임의식의 결핍이다. 현재 여당의 재창당 논의에서 지난 4년에 대한 책임 있는 반성은 찾아볼 수 없다. 과거의 여당들과 달리 열린우리당은 노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자율성과 협력의 권한을 부여받은 분권형 시대의 여당이었다. 따라서 지난 4년의 공과는 대통령과 여당의 공동책임구역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을 배제하고 '민주평화개혁세력'이 다시 뭉친다는 그림은 그동안 익히 보아온 '도마뱀 꼬리 자르기'에 불과하다. 역대 여당들은 지금까지 차기 대선이 다가올수록 레임덕 대통령을 부담으로만 여겨 결별.차별화, 심지어 비판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 왔다. 열린우리당은 요즘 새 출발을 얘기하지만, 그것이 진정 새롭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정직하고 용기 있는 반성이 우선해야 한다.

셋째, 현실감각의 결핍이다. 열린우리당이 재창당 표어로 내건 것이 '민주평화개혁'세력의 재결집이다. 하지만 이 구호는 흘러간 노래의 재방송에 불과하다. 정작 지금 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보다는 민주주의의 효과적인 통치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에 대한 주관적 의지가 아니라 평화를 지킬 능력이다. 지금은 개혁보다는 국민의 삶을 돌보는 정치가 요구되는 때다. 이 같은 세 가지의 빈곤을 넘어설 때 비로소 열린우리당은 간판만 바꿔 다는 일회용 신장개업을 넘어서 제대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