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 자랑하며 농담/「범민족」대표가 만나본 김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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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황석영씨등 33명 함북 주을온천 「집무실」서 오찬/“함한신문 사진은 과장” 주장/72년 7ㆍ4선언 일화 공개… 노대통령 호칭하기도
【평양=이찬삼특파원】 북한의 김일성주석이 범민족대회에 참가했던 해외대표에게 오찬을 내고 환담을 나눈 사실이 밝혀졌다.
기자는 16일 공식일정이 끝난 뒤 몇몇 대표들과 함께 금강산 관광을 끝내고 21일 평양으로 돌아왔다.
숙소인 고려호텔에서 로동신문을 들쳐보고 있는데 19일자 1면에 3분의2정도의 크기로 김주석이 황석영씨및 해외대표들과 기념촬영한 사진이 게재된 것을 보았다.
그러나 기사내용은 김주석이 해외대표 33명을 「접견」했다는 짤막한 것이었다.
기자는 사진이 게재된 참석자들을 찾아나서 가까스로 한 대표를 만나 이번 「접견」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신원을 밝히기를 원치 않은 이 참석자가 전한 이날의 김일성 면담전모는 다음과 같다.
『우리 일행들은 17일 낮 12시30분쯤 고려호텔에서 승용차에 3명씩 분승,평양시내 「모처」로 옮겨져 20분정도 대기했다.
16일 저녁 이미 개별적으로 「수령님 접견」이 있다는 비밀통보를 받은 터라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우리 일행은 순안비행장으로 가 특별기를 탔다.
도착한 곳은 함경북도 주을. 이곳 주을온천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이날 오후 9시 북한 어린이들의 공연을 관람했다.
다음날인 18일 아침식사를 끝낸 뒤 오전 10시30분 호텔을 떠나 낮 12시 정각 「모처」에 도착했다.
별장풍의 건물 정문에는 김일성주석이 문밖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수행원들은 이곳을 「집무실」로 불렀으며 김주석이 문밖에까지 나와 일행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는 표정이었다.
김주석은 황석영씨등과 포옹하며 환영을 표시한 뒤 실내로 안내,금강산의 대형 그림이 있는 벽면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했다.
김주석은 이어 집무실에서 33명의 대표들에게 약 15분간 연설했다. 각자의 앞에는 책상이 놓여있고 펜과 메모지가 준비되어 연설내용을 모두 기록할 수 있었다.
그는 먼저 지난 밤에 호텔에서 북한 어린이들의 공연을 잘 보았느냐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이들 어린이들은 모두 노동자ㆍ농민의 자녀들이며 전국경연대회에서 선발된 재주꾼들로 자신이 먼저 본 뒤 대표들에게도 보여주도록 지시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주을이 여진족말로서 「뜨거운 물」을 의미하며 주을온천은 결국 「온천 온천」이 되는 셈이지만 지금도 그냥 쓰고 있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김주석은 또 『최근 서울의 각 일간지에서 자신의 건강문제와 관련된 사진이 게재된 것으로 안다』면서 『그 사진은 가파른 계단을 내려올 때 잠깐 부축을 받은 것뿐인데 남조선 신문들이 과장했다』고 말하고,『내 자신의 건강은 현재 여러분이 보시는 것과 같다』면서 건강을 과시했다.
그는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의 남북한 협상원칙이 마련된 7ㆍ4공동성명 당시를 회고하면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락 중정부장이 새벽 3시에 왔더라』고 말하고 만나자 마자 『술취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가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안취했습니다』고 큰 소리로 외쳐 좌중이 폭소를 터뜨렸다고 말해 해외교포대표단 33명이 또다시 웃음을 터뜨리게 하려는 듯 분위기를 가볍게 이끌었다.
그는 노태우대통령에 대해 두번 언급을 하면서 한번은 「노태우」,또한번은 「노대통령」이라고 호칭.
그는 이어 통일문제ㆍ남북관계 현안을 비롯,해방직후의 일제에 의한 수탈과 지식인 부재상황등에 대해 15분간 언급한 뒤 『이제 연설은 그만두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깁시다』고 제의.
식탁위에는 그날의 차림을 적은 금색메뉴가 있었으며 각종 나물과 김치,그리고 주메뉴로 「검은색의 감자국수」가 등장. 김일성은 썩은 감자와 들깨국물로 만들었다는 이 국수를 항일유격대로 활동하던 당시에 먹던 음식이라고 소개했다.
약 45분간에 걸쳐 식사가 끝난 뒤 그는 실내에서 한사람씩 배웅인사를 나누었다.
짙은 회색옷을 입은 김은 가까이서 보아도 건강해 보였으며 농담을 잘하고 연설할 때도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하는등 실정에 밝은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별장에서 1시간쯤 걸려 공항으로 나가 이날 오후 우리 일행은 특별기편으로 평양으로 되돌아왔다.
김일성은 우리 일행을 맞았으나 김정일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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