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적 리듬의 가벼운 음악"|다양한 기법 돋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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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난 16, 17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연주된 재미 작곡가 서영세씨의 칸타타 『어둠의 기록』 (원제 노예 문서)은 전혀 새롭기 않으면서도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이 작품은 보스턴에서 세계 초연됐을 때 대성공을 거뒀다는 소식이 널리 전해졌던 만큼 호기심과 기대로 사뭇 흥분한 청중들은 시종일관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세계에서 두번째로 연주된 이 작품은 데이비드 후스의 섬세하고 다이내믹한 지휘로 더욱 돋보였으며 특히 마지막 바흐 풍의 오르간 독주와 장엄한 푸가는 이 작품의 절정을 이루며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이 작품만큼 다양성을 띤 음악은 세상에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작곡자 자신도 밝히고 있지만, 관현악법은 모차르트·베토벤·말러·라벨·스트라빈스키 등의 기법들이 두루 동원되고 있었고 노래도 헨델의 콜로라투라 (기교적이고, 화려한)적인 표현이 나타나는가하면 바흐적인 요소도 강력한 인상을 드러냈다.
거기에 흑인들과 관계되는 미국 민요의 단편들이 사이사이 삽입됐다.
쉬운 가락과 쉬운 화음, 그리고 미국적인 신코페이션 (당김 음) 리듬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때로는 극적인 리듬들이 강력한 인상을 남겼다.
단순한 조성과 가락이 관현악과 혼성 4중창 그리고 혼성합창에 의해 잘 짜여져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기법들은 앞에 언급한 많은 작곡가들 작품의 한 단편을 콜라주했다는 느낌보다는 서영세 음악의 일부분으로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작품을 듣는 사람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앞을 예측할 수 없이 긴장하게 만들었던 것은 수많은 기법들이 끝없이 변화하는 때문이라고 설명될 수도 있겠으나 실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다양성을 통한 곡의 구성이 명확한 구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 곡이 자연발생적인 자율성을 갖는 새로운 인상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은 작곡가가 이 작품을 전 인류의 문제로 고발하려고 한 정신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누구나 쉽게 정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작품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작곡가 서영세씨는 이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문제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가 지금까지 작곡해온 다른 작품들이 난해해 거의 연주가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대표작으로 20년 전에 작곡한 『몽유병자의 발라드』는 이제까지 한번 밖에 연주되지 못했다. 이렇게 난해하고 기법에 치우쳐 있었던 그가 돌연 쉬운 음악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대 음악이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청중들이 싫어하게 된다면 이것은 작곡가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작곡가도 청중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는 그의 말은 미국적인 상업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음미해 볼만한 가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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