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있는「과학교육」아쉽다|김호기<국립중앙과학관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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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몇 년 전 막내딸이 국민학교에 다닐 때 필자가 직접 본 일이다. 밤새도록 시험 공부하는 아이가「여자어린이가 옷 입는 순서」를 열심히 외우고 있었다. 다음날 아파트 승강기 내에서 같은또래의 사내아이 하나를 만나 나눈 대화는 더욱 걸작이다.
『몇 학년이니?』
『4학년 이예요.』
『너 남자어린이가 옷 입는 순서 아니?』
장난 삼아 물어 보았더니 그 순서를 순식간에 나열하고 나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아저씨는 그것도 모르세요』한다.
이제는 이런 내용이 교과서에서 사라졌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막내가 상급학교에 진학한 지금 공부하는 내용을 보면 여전히 모든 것이 암기위주다.
암기교육도 어느 정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프랑스와 같이 자유분방한 나라에서도 샤를마뉴대제의 통일, 정복자 기욤의 영국정벌,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 즉위 등과 같은 국사의 주요 연대라든가, 복잡한 불어문법에 관한 사항 등은 학생들에게 꼭 외우도록 지도한다. 우리도 우리민족으로서 꼭 알아야 할 일은 어릴 적부터 잘 암기해서 평생토록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수학이나 과학분야에 있어서도 꼭 외워야 할 기본원리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해로 터득해야 할 내용까지 마구 외우도록 강요한다는데 있다. 이런 철저한 암기 위주 식 교육은 청소년기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실험실습을 통한 자연현상의 원리 터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초·중·고교의 실험 기기는 한낱 전시품에 지나지 않고 있다. 함부로 학생들에게 만지게 하다가 고장이라도 난다면 담당교사가 시말서를 써야 하는 경우까지 있으니 말이다. 과학교사 자신들이 실험실습경험이 별로 없는. 경우가 많은데다 객관식 선다형 입시 준비에는 실험으로 시간을 빼앗기는 것이 오히려 손해가 되는 판이니 실험실습교육이 제대로 되기를 바랄 수 없다.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실습용 기자재가 외제라는 것을 우리는 예사로 흘려 버릴 수 없다. 우리의 희망인 새 싹들이 외제 기기의 상표를 보면서 과학교육을 받으며 자라나고 있다.
우리나라가 찬란한 과학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고 아무리 말로 가르친들 청소년들의 내면에 「과학은 외국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스며드는 것을 어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자란 새싹들이「우리가 앞장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어디서 구할 수 있을 것인가.
국적 있는 과학교육을 위해 우리제품이 설사 품질이 떨어지더라도 적어도 과학교육의 양에는 외제에 밀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국적 있는 과학교육이라고 해서 과학의 원리자체가「한국적」이어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세계 속의 우리위치를 공고히 다지면서 세상에 공통된 과학의 원리를 터득하고 이를 우리생활에 유익하게 응용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급한 일도 많겠지만 「국적 있는 과학교육」의 전개를 위해 우리 모두 뜻을 모으고 깊이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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