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결의안 '사실상 폐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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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일본 정부에 종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 인정과 반성을 촉구하는 내용의 미 의회 결의안이 일본의 집요한 로비에 밀려 또다시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이 결의안은 지난달 13일 하원 국제관계위원회의 심의를 만장일치로 통과해 과거 어느 때보다 채택 가능성이 컸지만, 본회의 상정이라는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미 보스턴 글로브지는 15일 미 하원이 종군 위안부 관련 결의안(759호) 채택을 미루고 있으며, 이는 일본의 로비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또 "결의안이 '사실상 폐기(effectively dead)'됐으며 표결에 부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언을 이미 지난달 미국 한인협회 관계자들이 받았다고 전했다.

일본의 반대 로비는 4월 레인 에번스(민주) 의원과 크리스토퍼 스미스(공화) 의원이 결의안을 발의하면서 본격화했다.

결의안은 구속력은 없지만 일본 정부에 대해 ▶종군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인정하고▶전쟁 범죄의 끔찍함을 후세에 교육하며▶유엔과 국제사면위원회의 권고를 따라 희생자들에게 배상할 것 등을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이에 일본 정부는 강력히 반발했다. 결의안이 채택되면 다른 전쟁 범죄에 대한 배상 요구도 봇물을 이룰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본은 이면으로 거물 로비스트를 고용, 결의안이 통과되면 미.일 관계가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 의회 핵심 인사들을 설득했다.

대표적인 로비스트가 전 공화당 원내대표인 밥 미셸이다. 워싱턴의 가장 영향력 있는 로비스트 중 한 명인 그는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 의장과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위원장을 집중 공략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탓인지 지난달 상임위를 통과한 결의안의 본회의 상정은 차일피일 늦춰졌다. 참다못한 의원 20여 명이 지난달 22일 해스터트 의장에게 조속 상정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현재 하원은 다음달 중간 선거를 대비해 휴회한 상태다.

최근의 북핵 사태도 결의안 채택에 부정적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일이 북핵 사태에 일사불란하게 대처하기를 바라는 미국으로서는 일본과의 갈등 소지가 될 수 있는 결의안 채택에 주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다시 입증된 일본의 막강한 로비력도 미국 내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는 "결의안 759호가 겪은 우여곡절은 외국 정부의 로비가 의원 수십 명의 의지를 어떻게 꺾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일본은 2001년과 2005년에도 위안부 관련 결의안이 상정되지 못하도록 저지했던 전력이 있다. 대외정책 관련 비정부기구인 아시아폴리시포인트의 민디 코틀러 대표는 "이번 사안은 단지 종군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미국의 정책 결정 그룹에 깊숙하게 뿌리내린 일본의 영향력의 문제를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조민근 기자

◆ 종군 위안부 결의안 일지

-2001, 2005년:미 하원에 종군 위안부 관련 일본 측 책임 인정 요구하는 결의안 제출됐으나 상정 못 하고 폐기

-2006년 4월:레인 에번스(민주), 크리스토퍼 스미스(공화) 의원 결의안(759호) 공동 제출

-6월:고이즈미 일본 총리 방미, 상정 연기

-9월 13일:하원 국제관계위원회 만장일치로 통과(759호)

-9월 22일:결의안 서명 의원 25명, 데니스 해스터트 하원 의장에게 조속 처리 요구 서한 발송

-9월 29일:전체회의 상정 안 한 채 하원 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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