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 수상 '정사'… 멀쩡한 중년의 '묻지마 섹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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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情事)는 친밀함의 완성이자 새로운 시작이다. 상대에게 온 몸을 열어보이는 행위는 '통하고 싶다'는, 소통에의 가장 지고한 형태다. 신뢰와 친숙함이 전제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기에 관계의 한 매듭이고, 더 깊고 풍요로운 세계로 이끄는 관문이기에 함께 내딛는 첫걸음이 된다.

정사는 몸과 마음까지, 상대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됐다는 충일감으로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인간의 본원적인 갈증을 해갈한다. 나아가 문명이 필연적으로 가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억압이라는 족쇄에서 풀려나는 해방감을 준다. 그래서 인간의 섹스는 동물의 교미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들한다. 정말 그런가?

*** 동물적 신음과 교성뿐

현실에서의 그 숱한 섹스가 이처럼 긍정적인 모습이기만 할까. 영화 '정사'(원제는 친밀함이란 뜻의 Intimacy)는 인간이 섹스에 입혀온 온갖 덧칠을 알몸이 드러날 때까지 징그럽게 벗겨버린다.

영화는 침묵의 섹스, 익명의 섹스로 시작한다. 매주 수요일 오후 2시, 정확히 그 시각에 여자는 남자의 집 벨을 누른다. 맹맹하게 힐끗 쳐다본 뒤 둘은 밀린 일을 치르듯 섹스를 한다. 잠시 숨을 고른 여자는 서둘러 옷을 챙겨입고 집을 나선다. 이름도 주소도 직업도 모른 채, 둘은 또 다시 1주일 뒤를 기약하는 것이다.

그들의 섹스는 친밀감의 결과도 아니었고 서로를 알고 싶다는 소통에의 열망을 잉태하지도 않았다. 수요일 오후의 그 짧은 시간 두 알몸이 격렬히 몸부림쳤다는 즉물적인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동물적인 신음과 교성 외에는 아무런 울림도 없다.

제이(마크 라일런스)라는 이름의 이 사내. 아내와 두 아이까지 두었건만 어느 날 홀연히 가정을 뛰쳐나와 바텐터를 하며 홀로 산다. 현실적 삶에 절망하고 여자에게 상처받은 그는 섹스에서 동물적인 욕정을 방출할 뿐이다. 더 이상 감정의 소용돌이는 없으리라 자신했다. 그런데 '계약 섹스'가 진행돼 가던 어느 날 상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그녀의 뒤를 밟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연극 배우이자 연출가였고 남편과 아들까지 있었다.

클레어(케리 폭스)라는 이름의 이 여인. 헌신적인 남편이 있고 자기 일에도 당당한 그녀가 왜 수요일 오후의 정사라는 게임에 몰두하는 것일까. 영화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단서를 던져 주지 않는다.

*** 사랑없는 섹스는 뭘까

사실은 이들의 행동을 설명할 뚜렷한 실마리가 없다는 점이야말로 영화가 보여주려는 테마다. 또 하나 '정사'에는 가부장제 질서 속에서 틀지워진 남녀의 역할이 뒤집어져 있다. 말없는 섹스가 초래한 감정의 혼돈으로 더 괴로워하는 건 남자이고, 떠나지 말라며 애원하는 쪽도 사내다. 여자는 이 모든 상황을, 마치 건널 수 없는 간극 저 너머에 있는 사람마냥 무심히 흘려 버린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L'aventura.1960년)'이후 유럽 영화가 던지는 남녀 관계에 대한 고민은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랑에 빠져도 외롭고 권태롭고, 안 하자니 또 다시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그 소외감과 부질없음이 여주인공 모니카 비티의 공허한 표정과 메마르기 그지없는 풍경에 담겨있다.

사랑이 현존하지 않는 곳에서 섹스란 그것을 뼈저리게 재확인하는 알리바이(부재 증명)일 따름이다. '여왕 마고'의 프랑스 감독 파트리스 셰로도 안토니오니를 따르고 있다. 다만 모니카 비티보다 케리 폭스(클레어 역)가 더 능동적이고 주체화돼 있다. '정사'로 2001년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탄 폭스는 2000년대의 모니카 비티로 모자람이 없다.

영화에는 꽤 많은 분량의 실제 정사 장면이 삽입돼 있다. 이 또한 우리 시대가 얼마나 사랑에 소외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수백명이 한 공간에 모여 타인의 정사 장면을 숨죽이며 훔쳐보는 시대. 섹스가 사물화해 거래되고 바꿔치기되는 게 일상화.대중화된 시대. '정사'는 인간에게 섹스는 더 이상 사랑의 연결고리가 아니지 않으냐고, 우울하게 묻는다. 31일 개봉. 18세 이상.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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