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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방송… 어디로 가야 하나/권영빈(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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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몇해전 미국으로 이민갔던 친구가 오랜만에 편지를 보내왔다. 직장도 구했고 살만한 형편도 되었다는 안부내용과 함께 그가 목격했던 미국 국민학교의 교문앞 풍경을 매우 인상깊게 적고 있었다.
미국 국민학교에 아들을 갓 입학시킨 그는 하교시간무렵 아들을 데리러 학교앞에 갔다. 크고도 넓은 교문을 학생 한명만 빠져나갈 정도로 빼꼼히 열어놓고 교사 두명이 학생을 하나씩 빠져나가게 하는 기이한 풍경을 그는 보게 되었다.
수백명 학생들이 수업을 끝내고 교문밖으로 밀려들 시간에 일부러 교문을 닫은 채 학생들을 하나씩 빠져나가게 하는 광경을 보면서 그는 한참만에야 아! 이것이 차례를 지키게 하고 양보와 질서의식을 심어주는 기초적인 시민교육이구나하고 깨닫게되었다는 사연이었다.
그 편지를 읽고난 다음날 아침신문에는 단순히 복도에서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그 학생을 쫓아가 휴대용 칼로 찔러 숨지게했다는 기막힌 사건이 보도되고 있다.
지극히 대조적인 두 사례를 대비시키는 까닭은 어느쪽 교육이 우월한가를 확인하자는 데 있지 않다. 어느 나라든 교육문제에 관한 한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문제점이 산적해 상대적 우위론을 거론할 수 없다. 다만 중요한 사실을 교육의 근본목적을 어디에 두고 어떤 방법으로 실천하느냐는 차이일 것이다.
앞의 편지에서 비친 교육의 목적은 건전한 민주시민으로 키우자는 데 그 뜻이 있다면,우리의 교육은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남는 방법,남을 밀치고 밟으면서 앞서가는 생존방식만을 장려하고 부추겼다는 반성에 이르게 된다.
과열입시,과열과외,점수따기 과당경쟁,과밀학급… 교육에 관한 한 모두가 「과」자 투성이다.
이 과열ㆍ과잉경쟁속에서 인성교육은 무시되고 가정교육은 도외시될 수밖에 없으며 학교교육은 학원교육으로 전락하면서 학생은 학생대로 시들어가고 부모는 부모대로 입시지옥을 함께 헤매면서 사회는 교육의 위기를 외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가정과 학교에서 방치하고 도외시할 수밖에 없는 인성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을 어디서 수용하고 돌봐야 할 것인가.
과열입시로 희생된 30만명에 달할 재수생과 가정형편으로 교육기회를 상실한 소외계층의 자녀들에게 값싸게 교육기회를 제공하면서 늘어나는 평생ㆍ사회교육의 욕구를 충족시킬 매체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처럼 절박한 교육에 대한 위기인식과 사회교육의 필요에 따라 제기된 것이 바로 교육방송의 위상이었고 그것의 효과적 추진을 위한 교육방송공사 설립안이 이미 지난해 국회에 제출되었던 터였다.
그렇지만 이 법안은 국회의 심의 한번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정부의 방송구조개편계획에 따라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문교부가 교육방송의 편성ㆍ기획ㆍ심의를 맡고 방송내용은 학교방송에 국한시킨다는 쪽으로 확정되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다시 국회에 제출되었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교육방송이 TV와 AMㆍFM라디오를 갖춘 MBC규모이상의 대규모 방송국으로 설립케 되었음은 더할나위없는 성과라고 반가워 할 일이다.
그러나 교육방송이 현행 교육체계를 위기라고 보는 진단과 새롭게 요구되는 평생ㆍ사회교육의 절실한 욕구에 의해 제기된 매체이고 그 위기를 치유하고 그 욕구를 수용해야 할 역할과 기능을 맡아야 한다면,결코 교육방송의 내용은 학교방송에만 국한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무엇이 학교방송인가. 초ㆍ중등교의 교과과정을 학원출신의 명강사에게 맡겨 현행의 TV과외를 전국적으로 방영하는 꼴이 된다.
과열ㆍ고액과외를 막기 위한 일시적 방편으로서 TV과외의 존재와 부분적 성공을 무시해서가 아니다. 일시적이어야 하고 언젠가는 사라져야 할 TV과외를 전국의 초ㆍ중등교에까지 확산ㆍ확대하는 학교방송이 된다면,과열입시 과열경쟁은 도시와 농촌에까지 불붙어 위기에 처한 학교교육을 더욱 위기로 몰아 끝내는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학교교육의 존재마저 깡그리 무너뜨릴 것이다. 교육의 위기를 치유하기는커녕 위기의 양산이고 확산일로로 치닫게 될 것이다.
결국 교육방송의 내요은 부분적으로 학교방송과 학교교육의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더라도 그 본령은 인성교육ㆍ민주시민교육ㆍ평생사회교육ㆍ원격교육 등에 치중돼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방송은 학교방송을 전담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교육을 관장하는 문교부가 방송의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도,또 성립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교육외적인 측면에서도 문교부가 방송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논리는 이미 되풀이되어 제기되고 있다. 교육이나 전파는 정부 또는 한 집단의 독점물이 될 수 없는 공적 소유의 대상이라는 점,공ㆍ민영체제를 벗어나는 관영ㆍ국영방송의 출현이라는 경계심리,현실적으로 문교부가 방송의 기획ㆍ편성ㆍ심의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능력이나 여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등이 합쳐져 그나마 확정된 교육방송 설립안이 실현되지도 못한 채 좌초할 궁지에 몰릴 형편이다.
교육방송이란 지역단위의 교통정보를 제공하는 교통방송과는 규모나 효과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국민적 규모의 기대와 욕구를 안고있는 거대한 방송매체다. 정부의 한 부처나 그 산하의 연구기관이 일방적으로 소유하거나 독점할 수 있는 그런 방송매체가 아니다.
교육을 주관하고 있는 여러 단체들,예컨대 교육개발원ㆍ방통대ㆍ교총,그리고 학부모를 대표하는 단체 등이 고루 참여하는 교육방송위원회가 교육방송의 주체로 먼저 설정되어야 한다.
이 위원회가 방송의 주체가 되면서 기획ㆍ편성ㆍ심의의 권한을 가질때 교육방송은 공영방송으로서의 모양을 갖출 뿐만 아니라 오늘의 교육위기를 풀어가는 방송매체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순조롭게 담당하게 될 것이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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