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이 빚은 유괴살인(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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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4일 오전10시 유치원생 곽재은양(6) 유괴살해 사건의 현장검증이 진행중인 서울 방이동 올림픽유치원. 학부모와 아파트주민 5백여명이 몰려와 치를 떨었다.
『늘 삐삐머리를 하고 다니던 재은이었는데….』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딸을 가진 주부 고모씨(34)는 현장검증을 지켜보다 마치 자신의 딸이 유괴라도 된듯 말을 잇지 못했다.
『저 노란 우산과 비옷은 재은이건데….』
유치원 2층 창문에 옹기종기 달라붙어 있던 꼬마들중 하나가 유괴 당일의 재은이 차림을 한 마네킹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유치원 보모가 황망히 커튼을 가렸다.
범인 홍순영양(23)은 처음 유괴를 하는 장면부터 숙대건물 6층 물탱크실에서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까지 시종 담담하고 침착하게 재연했다.
이제껏 꿈꿔온 거짓 환상에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어엿한 대학생,독실한 천주교신자,방송국 아나운서,그리고 고상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는 부잣집 규수.
힘에 부치는 완벽한 이상을 좇아 쌓아간 허상의 벽은 자신도 모르게 너무나 커져 도저히 허물수 없게 되었다.
『올A를 요구하는 사회의 낙오자가 되기 싫었어요.』
그녀는 뒤처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자신의 바람을 환상속에 그려나갔고 그 환상을 다른사람들에게 실제처럼 보이게하기 위해 가면을 써야했다. 주은 학생증으로 4년간 대학생 행세를 했고,금년2월 숙대 졸업식장에서는 가운을 입고 사진을 찍으며 부모님께 약혼자를 소개시키기도 했다.
『제가 대학을 다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모님도 알게되나요?』
경찰에서도 숙대졸업생임을 끝까지 주장하다 형사가 학적부와 졸업앨범을 들이대자 겨우 체념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끔찍한 범행에 대한 뉘우침보다 아직도 알몸뚱이가 드러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홍양의 모습에서 한 인간의 위선과 이기심의 극단적 결합을 보는 것같아 씁쓸했다.<이훈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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