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만에 북에서 온 “혈육소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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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인민군 끌려간 뒤 “생이별” 원병전씨/원씨 친구의 조카 중국교포 통해/고향에 두고온 4남매 편지받아/기다리다 고혈압으로 쓰러진채/동봉사진도 못봐 주위서 애태워/반공포로 석방후 재혼,구멍가게로 살림꾸려
헤어진지 40년만에 북한에 남겨두고온 아들ㆍ딸들이 남한에 살고 있는 아버지에게 혈육의 애끓는 정을 전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중국교포 중재로 이제야 겨우 분단장벽을 넘어온 편지건만 정작 기쁨의 눈물을 흘려야할 남쪽의 아버지가 4월30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병석에서 의식을 찾지못한채 동봉한 아들의 사진도 볼수 없어 주위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있다.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 용산2리 원병전씨(68)가 이북의 고향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에 살고있는 맏아들 원영관씨(50) 등 3남1녀의 편지를 받은것은 지난20일.
6ㆍ25가 나던 50년2월 고향에서 천도교관계일을 맡아보던 원씨가 일을 마치고 귀가길에 인민군 군관에게 끌려가 인민군에 억지 입대,가족들도 만나보지못한채 전쟁에 투입된지 40년만에 처음 받아본 가족들 소식이었다.
『존경하는 아버지께 올립니다』로 시작되는 아들의 편지는 헤어진 후 40∼50대로 성장한 세아들과 유복녀로 태어났던 막내딸의 직업과 주소ㆍ가족관계 등을 자세히 알려주고있다.
맏아들 영관씨는 편지에서 자신은 건설부문 작업반장으로 있고 둘째 영각씨(47)는 옛고향집에서 살며 농장 분조장,셋째 영종씨(44)는 농장기술지도원으로 각각 일하고 있다고 밝혔다.
영관씨는 또 원씨가 떠난후 유복녀로 태어난 막내딸 영옥씨(40)는 개천으로 출가,이제 가정을 꾸렸으며 큰아버지와 손자ㆍ손녀들의 소식까지도 자세히 알려왔다.
특히 영관씨는 편지 끝머리에서 아버지 원씨의 친필회신을 보고 싶다며 4남매가 함께 찍은 흑백사진 한장을 동봉했다.
원씨가 40년동안이나 애타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자녀들 편지를 받게된 것은 지난1월 원씨의 이웃이자 의동생인 장선봉씨(66ㆍ춘성군 신북면 용산3리)를 찾아온 중국 흑룡강성에 사는 장씨의 조카 김호철씨(40)를 만나면서부터.
당시만해도 거동이 자유로웠던 원씨는 김씨에게 고향에 살아있을지도 모를 자녀들의 생사만이라도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었다.
김씨는 중국으로 돌아가 원씨의 고향에 세차례 편지를 하는 등 수소문끝에 원씨 맏아들의 편지를 받아 이를 원씨에게 우송한 것이다.
원씨가 가족들을 그리며 지낸 40년은 고통과 한의 나날이었다.
50년 6월25일 전장에 내몰린 원씨는 여러곳의 전장을 떠돌다 공산군이 패주할때인 50년 10월14일 동료인민군과 함께 황해도근처에서 유엔군의 포로가 됐다.
인천과 부산ㆍ거제도 참대밭수용소생활을 거쳐 원씨는 53년 6월18일 반공포로로 석방됐다.
원씨는 이후 사진사,막노동판을 전전하다 54년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현재의 부인 이흥순씨(63)를 만나 재혼,자녀도 없이 단둘이 살고있다.
60년대초 춘천댐 건설때 인부로 취업해 현재의 마을로 옮겨와 살고 있는 원씨는 10년전부터 구멍가게를 하여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천도교 교리강의를 할만큼 한학에 밝았던 원씨는 동네 아이들에게 틈틈이 한문을 가르쳐왔다.
이 마을 김종복이장(57)은 『남북통일이 돼 아들 만나는 것이 소원이었던 원씨가 자식들의 사진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6ㆍ25가 갈라놓은 혈육의 정이 40년만에 간신히 이어졌지만 병마가 이들을 다시 영원히 갈라놓으려 하고있는 것이다.<춘천=이찬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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