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에 흔들리는 한국부자들의 '投心'

중앙일보

입력

현금성 자산이 100억 원이 넘는 거액 PB 고객인 A씨는 내년까지 기다려보기로 했던 싱가포르 현지의 부동산 구입 계획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하는 사업을 정리해야 하는 문제도 있고 해 미뤄뒀던 일이지만 북한의 핵실험 발표로 국내에 긴장감이 고조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무리를 해서라도 일찍 자산을 옮겨 놓는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A씨는 당장 모든 자산을 해외 자산으로 바꾸기는 어렵지만 당분간 국내에 고정자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현금자산부터 서서히 해외로 돌리는 방안 등을 고려중이다.

북한의 핵실험 파문에 한국 부자들이 술렁이고 있다. 보유 자산 중 해외투자 비중을 늘리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장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은 아직 드물지만 상황이 더 악화할 경우 현실화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그만큼 부자들의 경계감이 어느 때보다 크다는 얘기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부자고객들을 주로 상대하는 시중은행 PB들은 이날 고객들의 재테크 상담에 정신없이 하루를 보냈다. 북한의 핵실험 발표 이후 부쩍 늘어난 상담들 중 주요 내용은 보유 자산 중 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해외자산 비중을 늘리는 문제다.

A은행 강남지역 지점의 한 PB팀장은 "상당수 고객들의 첫 질문이 해외 투자에 대한 것"이라며 "국내 주식시장이 급락세를 이어갔을 때도 이렇지 않았는데 부자고객들의 경계감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날 하루 동안 20명의 부자고객들과 통화를 했다고 밝힌 B은행의 삼성역 지점 PB는 "핵실험을 했다고 해서 지금 바로 포트폴리오를 변경해야 하겠다는 고객들은 거의 없지만 조금더 지켜보자고 했던 분들도 이런 때에 포트폴리오를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는 분들이 많아진다"고 전했다.

해외 자산 투자에는 부자고객들 가운데도 현금성 자산만 100억 원이 넘는 거액고객들의 관심이 특히 크다. 보유자산이 이들보다 다소 떨어지는 고객들은 핵실험으로 인한 국내 경제의 급변동을 오히려 기회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위험만큼 수익을 낼 수 있는 기회도 커진다는 판단에서다.

그렇지만 수익보다는 기존 재산의 보전 쪽을 중시하는 거액 고객들은 다르다. 리스크가 큰 국내 자산 보다는 안전한 해외자산 쪽을 선호하는 성향이 더 강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국내자산을 팔고 해외자산으로 서둘러 옮겨가는 자본도피(capital flight) 내지 안전자산으로의 도피(flight to quality)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환율 급등 가능성을 의식해 해외 송금용 달러 환전을 늘리는 경우는 일부 있지만 전체적으로 달러 매입 수요 등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은행의 경우 달러 매입을 위환 환전 규모는 북한의 핵실험 성공 발표 당일인 지난 9일 1516만3000달러로 다소 많았지만 10일에는 1165만9000달러로 지난달 평균 1104만 달러와 큰 차이가 없었다.

외화예금 잔액도 마찬가지다. 우리은행의 외화예금 잔액은 지난 4일 27억1300만 달러에서 9일 32억 달러로 늘었지만 10일에는 다시 30억 달러로 줄었다. 신한은행도 4일 25억8100만 달러에서 9일 26억3200만 달러로 다소 늘었지만 10일은 26억3200만 달러로 변동이 없었다.

전문가들은 그러나 이번 북한 핵실험 건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부자 고객들이 자신의 포트폴리오 가운데 해외 자산을 늘려가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북핵 리스크의 위력을 실감한데다 해외부동산 취득 등 해외투자에 대한 정부의 규제도 완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5월 해외에 실제 거주하지 않더라도 시세차익이나 임대수익 등을 노린 투자 목적으로 일반기업이나 개인이 해외주택 등 부동산을 구입하는 것을 전격 허용했다. 한도는 일단 100만 달러로 정해지지만 단계적으로 상향조정되고 늦어도 3년 내에는 한도 없이 전면적으로 허용될 예정이다.

B은행의 한 PB는 "해외 부동산 취득의 문호를 연 것과 맞물려 해외로 자산이전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검토를 하다가 좀더 지켜보겠다던 고객들도 실행에 옮겨보겠다는 분들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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