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준의 진밭골 그림편지] 여백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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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쌀쌀한 가을 날씨입니다. 나무는 바람 길에 낙엽을 실려 보냅니다. 숲은 점점 커지는 빈틈으로 여백이 생깁니다. 여백은 물(物)과 물 사이의 빈 공간 정도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빈 공간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동양화에서는 천지인(天地人)을 세계관으로 가졌으니 지와 인을 물질의 세계로 표현했다면 천(天)을 여백으로 처리한 것이 아닐까요.

천은 모든 자연 만물의 이치로서 천리를 뜻합니다. 볼 수 없는 천리를 여지로 남겼던 것 아닐까요. 직관적 표현세계 말고 또 다른 깨달음의 영역을 여지로 남겼던 것 같습니다. 그 여지에 인문학이 개입하여 시서화라는 동아시아 특유의 미술문화가 생겼습니다. 그리하여 미술이며 동시에 서예이며 문학인 세계 인류문화사에서 그 유래가 없는, 경계 없는 격조의 예술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지금시대 퓨전화 개념화하는 시각예술의 추세를 근본적으로 정초할 열쇠가 숨어 있습니다. 물의 근원을 총체적으로 깨우치며 다가가려는- 격물(格物)하려는 자연에 대한 실천적 외경의 미학도 감춰져 있습니다. 그것의 표현 아닌 표현이 여백입니다.

김봉준 <화가>

◇'김봉준의 진밭골 그림 편지' 이번주로 끝냅니다. 그간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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