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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와 표현의 자유(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국사람들은 국기를 신주단지 모시 듯 하지 않는다. 고깔 모양의 아이스크림 종이그릇이나 햄버거집 점원의 모자에도 별과 줄무늬의 성조기가 그려져 있다. 성조기를 멋대로 가위질해 만든 듯한 수영팬츠는 해도 너무 했다는 인상을 준다.
달리 보면 미국사람들은 성조기를 그만큼 사랑한다는 얘기도 된다. 국기가 국민의 이상과 나라의 위엄을 상징하는 표시임엔 틀림없지만 그것이 두려움이나 우상의 대상이 돼서는 곤란하다. 그런 미국에서도 국민의례때면 성조기에 대한 경의는 여간 깍듯하지 않다.
바로 그 미국에서 지난 84년 국기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었다. 텍사스주 댈라스시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장에서 레이건의 국방정책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이 데모를 하며 성조기를 불태웠다. 법원은 주법에 따라 이들에게 금고와 벌금형을 내렸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처벌에 불복한 젊은이들이 최고재판소에 제소,지난해 6월 비로소 그 판결이 나왔다.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기 위해 국기를 불태운 행위는 헌법 수정1조에 보장된 권리다.』
파문이 없을 수 없다. 미 국민의 83%가 불법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오히려 권리라고 두둔했으니 말이다. 민주당은 재빨리 국기모독죄를 규정한 법률안을 의회에 제출,지난해 10월 연방법으로 성립시켰다.
그러나 지난 11일 최고재판소는 그 법률마저도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5대4의 근소한 표차지만 그 찬반의 의견은 너무도 선명했다.
찬성쪽의 브레난판사는 『국기모독에 대해서는 사회적 반발이 있지만 그것을 처벌하는 것은 국기를 존중하는 자유와 그 존중의 가치마저 약화시킨다』는 주장을 폈다. 한마디로 국기보다는 자유와 인권이 더 귀중하다는 뜻이다.
반대입장의 스티븐슨 판사는 주장한다. 『정부는 국기의 상징적 가치를 지킬 권리를 갖고 있으며,국기모독을 범죄로 처벌해도,그것은 정부에 항의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먼 발치에서 이런 재판을 보는 우리는 국기가 어쨌다는 얘기보다도 국민의 표현의 자유는 어떤 상황에서도 존중되어야 한다는 재판관의 양식에 더 감명을 받는다. 그 바탕엔 자유에 대한 애착과 신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조기는 더 함차게 나부낄 수 있다는 철학이 숨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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