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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송호근칼럼

핵이 터진 한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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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지난 6월 초, 평양 방문 때의 일이다. 인공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만경대 관람을 서둘러 마치고 휴게소에 앉은 필자 곁으로 정장 차림의 말쑥한 청년이 다가왔다. 안내를 구실로 우리의 행동반경을 좁혔던 보위부 소속 요원이었다.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어 말을 걸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부 출신 엘리트였다. 내심 반가운 마음에 직업의식이 발동했다.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 등 사회주의자들 중에 누가 가장 마음에 들지요?" 그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우린 그런 거, 일 없시요. 그저 주체경제학이면 족하지요."

'주체경제학'. 이건 논쟁을 아예 차단하는 답인데, 마침 그가 피워 물던 빨간 딱지의 말버러 담배가 눈에 띄었다. "주체경제학에는 외국산 담배 얘기는 없던가요?" 회심의 공격에 그는 역시 담담하게 말했다. "기호품과는 상관없지요." 만경대의 논쟁은 싱겁게 막을 내렸다.

그 청년과 필자 사이에는 휴전 60년의 세월보다 더 아득한 간극이 놓여 있었다. 그 간극은 반세기의 격랑과 사투해 온 두 국가의 생존 방식만큼 주름이 깊었다. 평양의 밤은 어두웠다. 제3세계 도시 치고 그런대로 웅장한 위용을 갖춘 공화국의 수도는 밤이 되자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주체탑의 불길이 조금 남아 있을 뿐, 인민들은 깨진 유리창과 시멘트 골조 속에 몸을 감췄다. 인민궁전 앞에서 만난 김일성대 출신의 또 다른 안내원의 비장한 어조가 떠올랐다. 시간.영토.역사가 총체적으로 이질화된 주체사상 속에 웅크린 채 그는 미국과 일본의 경제 제재행위를 공화국 인민의 생존을 압살하는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그가 말했다. "미 행정부가 압력 책동을 계속하면, 까짓것, 한판 붙어 보자요"라고.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고 했던가. 집게손을 한껏 쳐들고 거대한 수레바퀴에 저항하는 사마귀를.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했다. 불 꺼진 평양이 에너지 부족에 시름하는 북한 사정을 그대로 드러냈고, 남한 정부가 위험한 장난은 없을 거라고 몇 번이나 확신했기 때문에.

평양 정부가 대포동 2호를 멋지게 쏘아 올렸던 지난 7월에도 남한 정부는 국민들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고 말렸다. 그것은 무력시위가 아니라 정치적 사건일 뿐이고, 남한을 위협할 의도는 전혀 없다고. 그때도 김정일 위원장은 노동.대포동 미사일이 '미제를 까부수는 혁명 무력'임을 분명히 했었다. 그럼에도 남한의 대통령은 뭔가 미진했던지 북한의 핵 보유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전 세계 우방에 눈물겹게 설득했다. '주체 95년 10월 3일'. 북한 외무성이 급기야 지하 핵실험 계획을 선언했다. "미국의 극단적인 핵전쟁 위협과 제재 압력 책동은 우리로 하여금 상응한 방어적 대응조치로서… 핵시험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격문에도 남한 정부는 '그런 일은 없게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핵이 터졌다. '안전성이 보장된 과학적 핵실험'이란 말은 변명이고, 그야말로 핵폭탄이 한반도에서 터진 것이다. 비핵지대의 꿈, 평화의 희망은 어제로 막을 내렸다.

그것은 '모든 패러다임의 완벽한 붕괴'를 의미한다. 미국과 유엔은 물론, 일본.중국.러시아의 대북한 접근 전략의 유연성은 날아갔다. 핵무기가 터진 세계 유일의 지역, 한반도를 두고 미국과 유엔이 어떻게 돌변할 것인지, 4강 구도에 어떤 급격한 균열이 발생할 것인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캄캄한 공간으로 진입했다. 예측 불가능은 전략의 우연성과 돌발성을 불러들인다.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했어야 할 이 예측 불능의 상태는 이념적 친화성과 북한의 신뢰 유발이라는 초보적 태도로 일관했던 남한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제 남한 정부는 국제적 신뢰와 외교적 위상을 완전히 상실했다. '외교적 불구'란 말이 더 어울릴 이 정부 앞에 국민들은 망연자실할 뿐이다. 핵이 터진 한반도를 두고 어디선가 최악의 시나리오가 구상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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