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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그때, '아시아 4龍' 어떻게 변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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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는 지난해 “아시아 4룡은 더 이상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사실상 사망선고였다. 대신 그는 ‘친디아(Chindia)’ 시대를 말했다. ‘아시아 4룡’은 끝내 추락하는 것일까?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5년 유엔 아시아극동위원회는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라는 인쇄물을 발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아시아 경제는 필리핀과 대만이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필리핀은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뒤 기계와 원자재 수입에 대한 우대환율정책과 기업에 대한 세제 우대 등을 통해 제조업을 육성했다. 게다가 ‘한국전쟁 특수’까지 겹치면서 당시 필리핀은 신흥공업국의 원조와 같은 존재였다.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는 당시 필리핀의 경제상황을 “1946~54년 연평균 성장률은 14.5%로 아시아 지역에서 1위”라고 적고 있다.

대만도 만만찮았다. 중국 대륙의 공산 정권 수립으로 국민당 정부가 옮겨간 대만은 1948~54년 연평균 12%의 경제성장을 이뤘다.

뒤를 쫓는 국가는 실론(스리랑카)과 일본이었다. 두 국가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연평균 경제성장률 8%대의 높은 성장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뒤이어 태국이 6%대로 추격 중이었고, 말라야(말레이시아)·인도·버마(미얀마)가 2~4%대로 미약하나마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1950년대는 아시아 4룡의 ‘암흑기’

보고서에 따르면 1955년 기준으로 아시아에서 중공업 기반을 가진 나라는 중국·인도·일본 3개국뿐이었다. 신생 독립국 중에서는 실론·인도네시아·파키스탄·필리핀 등에서 화학·철강 공장이 건설되고 기계 생산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향후 경제 발전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인 투자율은 일본·버마만이 선진국과 비슷한 20%대를 기록했다.

한국과 홍콩·싱가포르는 어땠을까? 이제 겨우 휴전협정을 마치고 폐허 상태나 다름없던 한국은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마이너스 성장(-1.3%)을 기록해 최하위에 처져 있었다. 싱가포르와 홍콩은 식민지 상태였던 탓에 아예 보고서 작성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당시 싱가포르는 일본 패전 후에도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좌우의 대립이 극심했다.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전 총리는 자서전에서 1955년 상황을 “당시 실업률은 12%였다. 농사지을 농토도 없었고 새로운 산업을 위한 규모 있는 내수시장도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인민행동당이 집권해야 하는 이유를 싱가포르의 위기에서 찾았다. 싱가포르는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집권한 이후에야 경제 개발에 나서게 된다.

1959년 영국 자치령 정부를 구성하는 총선을 앞두고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로 아시아에서는 상대적으로 부유했지만 1949년 중국 대륙에 공산 정권이 들어선 후 늘어나는 난민이 골칫덩어리였다. 몰려오는 난민에게 집·학교·병원과 일자리를 만들어 줘야 했지만 좁은 섬나라로서는 경작지와 공장을 짓기에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1955년의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는 “홍콩의 1948~52년 성장률은 연평균 4.3%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민 증가로 인해 1인당 생산량은 감소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총인구가 약 250만 명이었던 도시국가인 홍콩에 연평균 60만 명의 인구가 늘었다.

대만은 연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에도 홍콩과 마찬가지로 인구 급증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대만의 1인당 생산량 증가는 총생산 증가율보다 훨씬 떨어지는 연평균 7%였다.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60여 만 명과 높은 인구증가율로 인구밀도는 1㎢당 257명으로 아시아 1위였다.

1955년에도 대만은 주 수출품이 설탕과 쌀인 농업국가였고, 제조업 육성을 위한 국내자금이 부족했기 때문에 향후 성장세가 지속될지 의심스러웠다. 성장을 위한 투자는 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다.

이처럼 50여 년 전의 아시아 경제 상황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1960~90년대 고도성장을 달성하며 세계를 놀라게 한 ‘아시아의 네 마리 용(한국·싱가포르·홍콩·대만)’은 당시에는 암흑 속에 묻혀 있었다.

출발이 늦었던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고도성장의 길에 들어선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선두에 선 국가는 싱가포르. 이 도시국가는 1965년 독립 후 리콴유 총리가 1990년까지 장기집권하면서 다국적기업의 아시아 전진기지 역할을 자처하면서 성장했다. 싱가포르는 기업들의 싱가포르 유치를 전담하는 경제개발청(EDB)을 세워 공장을 이전하는 다국적기업에 면세 등 각종 특혜를 주면서 제조공장을 유치하는 전략을 폈다.

홍콩은 비공산권 국가와 대립하는 중국의 ‘죽의 장막’ 정책이 1966년부터 10년간 진행된 문화대혁명으로 공고해지자 중계무역도시로서의 이점을 살려 성장하게 된다. 대만과 한국은 각각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 체제 아래 수출주도형 경제개발 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특히 1973년 터진 제1차 오일쇼크는 이들에게 위기인 동시에 기회였다. 당시 선진국들은 1950년대부터 오일쇼크 이전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 호황기’였다는 20여 년을 향유했지만 오일쇼크로 큰 충격을 받고 갑작스러운 침체기에 빠지게 된다. 선진국 경제가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신흥 국가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경제의 새로운 주자로 떠오르며 신흥공업국(NICs)이라고 불리게 된다. NICs는 동아시아의 한국·싱가포르·홍콩·대만, 남미의 브라질·멕시코, 남유럽의 그리스·포르투갈·스페인·유고슬라비아 등이다.

1993년 세계은행, ‘동아시아의 기적’ 격찬

▶싱가포르는 글로벌 기업들의 아시아 전진기지 역할을 자처하며 성장동력을 키워 왔다. 초고층 빌딩이 들어찬 싱가포르 시내.

▶수출은 한국이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는 원동력이 됐다. 인천항에서 수출을 위해 선적을 기다리는 자동차

1980년대가 되자 NICs의 운명도 갈린다. 남미의 NICs는 외환위기가 덮치면서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고, 유럽의 NICs는 정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반면 동아시아의 NICs는 전진을 멈출 줄 몰랐다.
1990년대 아시아 NICs의 계속된 성공 스토리는 마침내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93년 세계은행은 ‘동아시아의 기적(East Asian Miracle)’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네 마리 용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성과와 원인을 분석한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서 기적을 일으킨 것으로 거론된 국가는 일본·홍콩·한국·싱가포르·대만·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 등 8개국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이 단연 관심의 초점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8개국의 1인당 생산량은 1960~90년 연평균 5.5%의 성장률을 보여 남미와 남아시아 지역에 비해 3배, 아프리카 국가에 비해서는 5배나 빠르게 성장했다. 2~3%대였던 중동이나 선진 공업국보다 성장률이 높았다. 특히 싱가포르·홍콩·대만·한국과 일본의 1인당 소득은 1960~85년 사이 동반성장했던 동남아시아에 비해서도 2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보고서는 “성장이 무작위로 분포한다고 가정하면 고도성장이 지역적으로 집중될 확률은 약 1만 분의 1 정도”라며 “수년간 고성장한 개발도상국은 있었지만 수십 년간 고성장한 개발도상국들은 없었다”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세계은행은 동아시아 성공의 원인을 물적·인적 자본의 축적, 안정적 거시정책, 적절한 정부 개입 정책의 성공 등에서 찾았다.

그러나 네 마리 용의 ‘욱일승천’은 여기까지였다. 1990년대 본격적인 개혁 개방에 나선 중국의 부상에 따라 저임금 제조업에서 경쟁력을 잃어 갔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때문에 2000년대 들어서는 “과거 발전 모델의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까지 받게 된다.

실제로 아시아 4룡의 경제는 최근 수년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1~04년 대만과 싱가포르의 평균 성장률은 2%대에 머물렀고, 다소 나은 한국과 홍콩도 3~4%대에 불과했다. 1인당 국민총생산(GNP)도 한국만이 과거 최고치를 상회했을 뿐, 대만의 경우 지난해 1997년의 소득을 간신히 회복했으며 싱가포르·홍콩의 경우는 지난해 1인당 소득이 1997년에 비해 아직 10% 정도 낮은 수준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자본 축적이 심화하면 필연적으로 성장률은 둔화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들 네 마리 용의 문제는 감속 속도가 빠르고 활력도 저하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제 활력의 저하는 투자 부진에서 찾을 수 있다.

NICs 저물고 ‘친디아 시대’ 온다

외환위기 이전인 1990~95년 신흥공업국의 투자율은 중소기업 기반이 강한 대만의 24% 수준을 제외하면 30% 수준(홍콩)이거나 그 이상(한국·싱가포르)이었지만 현재는 모든 국가에서 거의 10%포인트 정도 떨어졌다. 투자율의 급락으로 성장잠재력이 훼손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NICs의 경제 침체 원인은 많지만 전문가들은 중국의 부상으로 기존의 발전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꼽는다. 1960년대 이후 이들 국가의 성장동력은 고투자·수출주도 전략이었는데, 1990년대 들어 중국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서 이러한 전략이 한계를 맞았다는 것이다. 동아시아가 세계시장에서 동시에 경쟁하면서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낮은 NICs의 상품이 밀려나게 됐고, 그로 인해 교역조건도 급속히 악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NICs는 모두 중국과의 산업 분업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국내에서는 고부가가치 제조나 연구개발(R&D) 기능에 집중하고 중국에서는 중·저급품 생산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산업 분업을 추진한다고 해도 NICs의 고민은 여전히 남는다. 무너진 둑에서 쏟아지는 물처럼 대중국 투자가 홍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의 저렴한 생산요소를 활용하기 위한 우회수출형 사양산업의 이전에 그치지 않고 중국의 내구소비재 시장이 확대되면서 이를 선점하기 위해 내수산업의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

중국의 급부상과 더불어 아시아 4룡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신흥국가로 인도를 빼놓을 수 없다. 이른바 BRICs 국가 중 아시아 2개국에 해당하는 이들은 이미 4룡을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양국의 저력은 무서운 성장 속도에 있다. 투자 자문사인 골드먼삭스는 2003년 일찌감치 ‘2039년이 되면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인도는 일본을 능가할 것’이라고 예측한 바 있다. 당장 2년 뒤인 2007년 중국은 경제규모에서 독일을 따라잡고, 2015년에는 일본을 추월할 것으로 예상됐다.

인구 13억 명의 중국은 구매력 기준으로 이미 일본을 앞질러 세계 2위에 올라 있다. 인구 10억 명의 인도도 일본에 이어 4위다.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중국은 연평균 8~10%, 인도는 연평균 4~8%의 고성장을 이어 가고 있다. 지금도 투자가 활발하고 시장 개방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고성장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들 두 나라는 석유기업 유코스를 공기업화해 시장 개방에 역행하는 러시아나 원자재 수출 비중이 지나치게 큰 브라질 등 경쟁국에 비해 해외 자본의 투자 매력과 안정성이 높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현재 추진 중인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실현되면 양국은 세계 최대 경제권인 ‘23억 명의 시장’을 공유할 뿐 아니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누릴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의 공장’에 비유될 만큼 제조업이 발달한 중국은 서비스 산업이 제조업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고민이다. 반면 ‘세계 IT의 허브’라고 할 수 있는 인도는 서비스 산업에 한참 처진 제조업 때문에 애를 태우고 있다.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2001년 23억 달러에 불과하던 양국 교역규모는 지난해 136억 달러로 6배 늘어났다. FTA가 체결되면 항공·우주·생명과학 등 신기술과 에너지·천연자원 개발 분야의 협력도 예상된다.

이에 아시아 4룡은 제조업의 분업이라는 전통적인 협력의 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고 있다. 대만은 정치적으로 대중국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만은 또 최근 ‘도전 2008 계획’을 통해 R&D 및 지식기반의 국제경제지역으로 전환한다는 청사진을 발표했다. 이를 위해 R&D 지출을 국내총생산(GDP)의 3% 수준으로 높이기로 했다. 해외 신기술인력 채용, 외국유학생 유치, 국내 대학의 국제화 등을 통해 R&D 인력을 유치하고 유전자 연구, 소프트웨어 디자인, 이동통신 R&D, 나노기술 활용 R&D, 정밀기계 R&D 등의 특화된 센터를 건설해 대만을 아시아의 혁신과 R&D 기지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의 경우 동남아로 진출하려는 중국기업의 본사 기능을 싱가포르에 유치해 이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계획이다. 싱가포르는 또 ‘역동적 글로벌 시티’를 국가 비전으로 정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세계 주요 국가 및 지역과 FTA를 체결하면서 FTA의 허브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성장률, 50년 만에 다시 최하위권으로

▶중국 해운업체인 코스코의 최고경영자 웨이자이푸(왼쪽)가 홍콩 증권거래소에서 칼슨 퉁(오른쪽에서 두 번째) 상장위원회 부위원장과 차우만유 홍콩 증권거래소 회장(오른쪽)에게 화물선 모델을 선물하고 있다. 코스코 그룹은 홍콩 증시 상장을 통해 12억2,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기술강국 대만의 상징인 신주과학공업단지 전경.

싱가포르는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 외에 호주·뉴질랜드·일본·한국·인도·미국·유럽 자유무역연합(EFTA) 등 수많은 국가와 FTA를 체결했다. FTA 허브는 기존 싱가포르가 갖고 있던 금융·물류의 중심지를 한 단계 상승시켜 다국적기업의 유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홍콩은 중국과 상품·서비스의 교역·무역 및 투자 원활화를 포함한 경제긴밀화협정(CEPA)을 체결했다. 동시에 홍콩은 인접한 광둥(廣東)성과의 지역 분업을 통한 경제 발전을 추진하고 있다. 홍콩이 금융·물류 사업 및 전문 서비스업에 집중하고 광둥성은 제조업에 집중할 수 있는 협력 여건을 조성하면 상호 이익이 될 것이라고 본다. 또한 중국 주강델타에 입지한 외국기업의 서비스 기지로서 홍콩의 장점을 홍보하고 있으며, 나아가 광둥성 내 사영기업의 대홍콩 투자 유치에도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더불어 홍콩은 입지경쟁력 제고를 위한 국토계획에도 정성을 쏟고 있다. 홍콩은 ‘2030년 홍콩’이라는 장기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계획은 중국과의 관계 설정, 홍콩의 경쟁력 제고, 삶의 질 개선, 정체성과 이미지 강화 등 4개 전략적 주제를 포함하는데, 21세기 북미의 뉴욕, 유럽의 런던 같은 아시아의 중심적 세계도시를 만든다는 것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떨까? 안타깝게도 한국경제는 “한강의 기적이 끝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에 휩싸여 있다. 한국은 고속성장 가도를 질주하며 아시아의 경제성장을 이끌던 시절을 뒤로하고 최근 성장 속도 면에서 아시아 꼴찌 수준으로 전락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3년간(2003~2005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3.9%로 아시아 14개국 중 13위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싱가포르(6.0%)·홍콩(6.4%)·대만(4.5%) 등은 모두 우리를 앞서 나갔다. 경제성장률로만 본다면 ‘아시아 극동 경제 보고서’가 발간되던 1955년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ADB가 예상한 올해의 경제성장률에서도 한국은 바닥을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7월 발표한 ADB 전망치(아시아경제 모니터)에 따르면 올해 한국의 성장률 예상치는 5.1%로, 아시아 지역 14개국 중 10위에 머물렀다. 싱가포르 6.1%, 홍콩 6.5%, 베트남 7.8% 등에 뒤졌으며 한국보다 못한 곳은 필리핀(5.0%)·태국(4.7%)·대만(4.4%)뿐이었다.

국민이 향후 경제에 대해 피부로 느끼는 기대감도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비관적이다. AC 닐슨은 올 상반기 세계 40개국 2만1,700명을 대상으로 경제 전망을 물어본 결과 한국의 ‘소비자 신뢰지수’가 54로 최하위를 기록했다고 지난 8월29일 발표했다. 지난해 상반기 지수가 58에서 하반기에는 62까지 올라왔지만 6개월 만에 다시 급락한 것이다. 이 조사에서는 인도의 소비자 신뢰지수가 131로 3회 연속 세계 최고치를 기록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이 이런 상황을 맞은 원인을 ‘키워드 부재’에서 찾는다. 여전히 역동성을 잃지 않은 홍콩과 싱가포르의 경우 국가적 지향점이 분명했지만 우리는 목표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인구 700만 명의 섬 홍콩이 한국과 비슷한 5,000억 달러 교역을 쌓은 비결은 무한한 기업활동의 자유다. 영국 통치 때부터 기업과 주민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는 ‘작은 정부’를 목표로 삼았다. 자잘한 통계자료 수집조차 간섭으로 비칠까 우려해 삼갔다. 지금도 외국기업이 지사를 만들겠다면 투자청 관리가 건물주와 대신 협상해 임차료를 깎아 주고 개업식에 나와 축하해 준다. 경제자유네트워크(EFN)가 뽑는 세계경제자유지수에서 홍콩은 1980년부터 줄곧 1위다. 한국은 127개국 중 35위(2003년) 수준이다.

우리를 까마득히 앞서가는 싱가포르의 키워드는 ‘개방’이다. 서울 넓이밖에 안 되는 나라에 MIT·코넬·존스홉킨스·인시애드(INSEAD) 같은 세계 명문대와 초일류 경영대학원 12개가 들어와 있다. 인구 10명당 한 명이 외국인 유학생이다. 엘리자베스병원·래플즈병원을 비롯한 8개 보건의료기관과 5개 해외환자서비스센터를 내세워 2004년 한 해에만 27만 명의 해외 환자를 유치했다.

반면 한국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는 대만의 사례에서는 안타깝게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이 목격된다. 1998년 외환위기 무렵만 해도 한국에 앞서 있던 대만은 정치불안으로 인해 최근 몇 년을 허송세월하고 있다.

대만, 대미관계 악화로 추락 일로

대만은 지난 50여 년간 이어졌던 국민당의 아성을 깨고 2000년 집권에 성공한 천수이볜(陳水扁) 총통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천 총통은 ‘대만 독립론’을 내세우며 ‘자주’를 강조했지만, 이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하는 역풍을 맞았다. 총통 전세기가 미국 본토 착륙허가를 받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일어났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 불안이 곧바로 대만경제에 타격을 가했다는 점. 글로벌 기업들의 부품 생산이 주력인 대만경제는 대미관계 악화라는 돌발 악재 앞에서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천 총통 진영의 국가 경영 성적표는 화려한 구호와 반대로 초라하기 짝이 없다. 천 총통 집권 6년 만에 대만의 대외 부채는 460%나 급증했다.

2000년 5.7%였던 경제성장률은 다음해 -2.2%로 곤두박질쳤다가 지난해 3% 남짓으로 아시아 4룡 중 꼴찌다. 반대로 실업률은 6년 전 2.9%에서 4.1%로 치솟았다. 게다가 그는 친·인척과 측근들이 잇따라 비리에 연루되면서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 대만 국민은 거리로 뛰쳐나와 그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대만의 사례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아마추어 정부의 자주와 개혁 구호, 이로 인한 대미관계 악화, 그 결과로 빚어진 경제성장률 하락과 실업자 급증…. 이 모두가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들이다.

다각적인 협력관계를 통해 중국의 성장을 활용하고 국내경쟁력을 제고해 성장잠재력을 복원하겠다는 NICs의 의도가 성공할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NICs 국가들은 현재 선진 경제국이 되느냐 아니면 퇴보하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정일환_월간중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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