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대희 칼럼] 8부 능선형 부부들의 착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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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필자가 살고 있는 서울 청담동 주택지 뒤쪽으로 영동교에서 성수교에 이르는 강변에 '갈매기 공원'이 있다. 거기 4km 남짓한 산책로에는 아침저녁으로 조깅하는 커플들이 줄을 잇는다. 2 ̄3m 앞서 성큼 성큼 뛰어가는 남자 뒤로 작은 체구의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달려가는 모습은 필자 같은 실버 에이지 눈에 마냥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비단 달리기뿐 아니라 사랑이나 성적 생활까지도 잘 조화를 이뤄야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십보백보라는 말처럼 사랑의 구체적 표현인 섹스에서 남자가 앞서가고 여자가 그 뒤를 쫓아가는 식으로는 만족한 부부생활을 보장받을 수 없다. 바꾸어 말하면 남성과 여성의 달리기는 속도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어 이것을 조절하는 테크닉이 없으면 섹스는 물론 남녀 간의 사랑도 냉랭하게 식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 차질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남녀가 서로 다른 흥분과 쾌감의 생리적 차이에 대한 예비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그런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일찍이 반 데 베르데란 학자는 그의 저서 'sexus'란 책에서 남녀 간 성적 흥분의 차이를 설명하는 도표를 만들어 그 생리적 차이를 설명한 바 있다. 이것이 유명한 '베르데식 쾌감 곡선'이란 것으로 유럽에서 지식인들은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섹스 상식의 하나였다.

그러나 임상에서 발기불능증 상태인 남성이나 불감증 여성을 진료하다 보면 남녀의 베르데식 성적 흥분 곡선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선 가장 큰 오류는 남녀의 오르가슴 과정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마치 계단을 하나씩 걸어 오르듯 규칙적이면서 단계적으로 쾌감 또는 흥분이 상승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오르가슴은 자극의 집적에 의해 극치감 반사의 극에 달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하고 또한 남성의 성적 쾌감 곡선은 조급하게 상승해 설붕상하강(雪崩狀下降)을 이루는 예각형으로 되어 있다. 그런 생리적 특성 때문에 남성은 대부분 조루하고 또한 일단 사정하고 나면 급격하게 성적 흥분이 냉각돼 버리게 된다. 이에 반해 여성의 경우에는 완만한 상승과 하강을 동시에 보여주는 둔각형이란 점에서는 학문적으로 베르데의 주장에 전혀 이의가 없다.

하지만 실제로 첨단 전자장비로 생리적 변화를 탐지해 보면, 남성의 경우에도 비약적으로 흥분하는 곡선 형태는 아니고, 여성의 쾌감에는 오르가슴에 즈음하여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모습을 거의 모든 여성에게서 볼 수 있다. 즉 여성의 최후 오르가슴을 큰 발작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도달하기까지 1회 또는 그 이상 오르가슴과 비슷한 작은 발작이 있고, 성감은 그것에 의해 급커브를 그리며 높아진다.

이런 성감의 커브를 산에 비유하면, 그 상승 커브가 이루는 피크 중에 먼저 페니스의 삽입에 의해 작은 발작이 일어나고, 6부 능선이나 8부 능선까지 상승하는 것이 평균적 사례다. 그런데 남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당사자인 여성까지도 왕왕 그 소발작을 클라이맥스로 오인하고 그것만으로 불감증이 아니라고 단정하거나 스스로 성적 만족감을 얻었다고 자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므로 만일 8부 능선쯤에서 소발작을 진짜 오르가슴으로 착각해 남성이 사정한다면, 여성은 일단 심리적 만족감은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생리적으로 수축된 근육의 충분한 이완이 달성되지 않아서, 다시 말해 근육에 생긴 긴장이나 충혈이 깨끗이 해소되지 않아서 불감증 등 여러 가지 장해가 초래될 수 있다.

이런 선에서 만족하는 여성들을 유럽에는 '8부 능선형 불감증'이라고 부르고, 전체 여성의 60% 정도가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치 간질병 환자가 소발작만 있고 대발작이 오지 않으면 머리가 무거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섹스 또한 작은 발작만 경험하고 큰 발작이 후속되지 않으면 성적 흥분이 조성한 심신의 긴장은 해소되지 않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는 남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곽대희비뇨기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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