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상처 「통석」으로 봉합/노대통령 방일 2박3일 결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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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 요구사항 안내놔 외교부담/교포처우 거론 성과/일 남북게임 일침도
노태우대통령의 이번 방일 정상외교는 그동안 양국관계의 걸림돌이 되어왔던 과거사에 대한 사죄문제를 일단 매듭짓고 21세기를 향한 미래지향적 새 관계를 향한 주춧돌을 놓았다는 의미가 크다.
가깝고도 먼 나라로 느껴져왔던 두 나라 관계가 하루아침에 가깝고도 가까운 이웃으로 변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노대통령의 방일은 양국이 불행했던 과거를 씻고 동반자로서 새로운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었던 아키히토(명인) 일왕의 사과에 있어선 우리 국민의 감정상 흡족지는 않았지만 일본이 전에 비해 상당한 성의를 표하려고 한 흔적만은 부인키 어렵다.
일본측이 우리 정부가 요구했던 가해자와 피해자를 밝혔고 사과주체를 일왕이 「본인」이라고 명백히 한 배경은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작년 히로히토(유인) 일왕의 사후 현재의 아키히토 일왕의 평성시대가 개막되면서 전후청산을 마무리하고 새 시대를 여는 분위기가 일본내에 성숙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번째는 급변하는 국제정세가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을 보는 인식을 바꾸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동구의 개방물결과 92년 EC통합을 바라보는 일본으로서는 블록화현상을 보이고 있는 국제정세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입장은 한국도 마찬가지여서 남북통일과 선진국 진입이라는 두가지 큰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제정세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만 했다고 할 수 있다.
노대통령이 『지나간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묶어놓는 족쇄가 될 수 없다』며 『한일 양국의 협력관계는 다가오는 태평양시대의 주축이 돼야한다』고 여러번 강조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한일 양국은 21세기를 10년 앞두고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는 상황인식에 의견일치를 보인 것이다.
이번 노대통령의 방일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거둔 성과는 우리가 하고 싶은 말과 바라는 바를 일본 국민에게 분명히 전달했다는 점일 것이다.
노대통령의 25일 국회연설은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역사적 기록으로 남을 만하다. 한일 관계의 과거를 짚고 현재를 분석하면서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이제 한국은 과거의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일본 국민에 인식시키려했다.
노대통령이 국회연설에서 북한을 한국의 동반자로 분명히 못박고 금세기안에 평화적 남북통일실현의지를 표명한 것은 지금까지 분단된 두개의 한국을 이용,외교게임을 즐겨온 일본의 한반도정책에 일침을 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노대통령이 70만 재일 한국인문제를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거론함으로써 일본인들에게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고 재일동포사회에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도 이번 방일의 성과로 거론될 수 있다.
노대통령은 이번에 일왕을 비롯,일본지도층으로부터 정중한 예우를 받았다.
예정에 없던 왕궁정원산책,네차례에 걸친 노대통령과 일왕의 만남,그리고 국회연설,공항영접 등의 의전절차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방일에서 미흡했던 점도 적지않았다. 아키히토일왕·가이후(해부)총리·사쿠라우치(앵내의웅) 중의원의장등 일본지도층이 모두 나섰던 과거사 사과에서 일본의 침략행위와 식민지 통치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 없었던 것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한 「사죄」가 되지 못했지만 사죄로 간주해야 하는 외교적 한계가 있다.
또 일본측이 「기브앤드 테이크」의 철칙이 지켜지는 국가간 외교에서 그들이 구체적 요구사항을 내놓지 않은 점은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느끼게 한다. 이점이 앞으로 노대통령정부에 어떤 외교적 부담으로 나타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동경=이규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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