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자 위해 살다간 「장애자 판사」|윤화로 숨진 정순희씨 생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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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20일 오후 7시쯤 제주도 북제주군 해안일주도로에서 제주지방법원 정순희판사(35·여) 가 장애자용 포니엑셀 승용차를 몰고 가다 길가 돌담을 들이받고 숨겼다.』
정 판사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은 며칠 전 신문에 실렸던 이 1단기사가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있다.
법학도로서, 우리나라의 13번째 여성판사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꿋꿋이 일어섰던 한 인간으로서 독신으로 살아 온 그녀의 밀도높은 생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여고 때부터 그녀를 지켜보아 온 황년대 정립회관 관장(52·여)은 『모든 장애자의 슬픔』이라고 했고 서울가정법원에서 그녀와 함께 근무했던 이재훈 성남지원장(48)은 『번듯한 여성지도자 감을 잃었다』고 애통해했다.
같은 장애자로서 그녀를 특히 아껴온 김용준 대법관(52)은 비보를 듣고 한동안 말을 잊었다.
그녀의 서른 다섯 해 짧았던 생은 장애의 끈질긴 도전을 물리친 작은 승리였다.
서울 옥인동에서 체신부 공무원이었던 정생추씨(7l)와 양윤숙씨(66) 사이에 세 자매의 맏 딸로 태어난 정씨는 1세 때 소아마비에 걸렸다.
장애는 이후 줄곧 그녀를 괴롭혔으나 그녀는「공부」로 맞섰다.
수재였던 그녀는 경기여중고를 거쳐 74년 서울대법대에 진학, 여섯 번의 도전 끝에 83년 사시 25회에 합격했다.
「판사」는 어릴 적부터의 꿈이었다.
86년 사법연수원을 9등으로 졸업한 정씨는 그해 3월 수원지법에서 판사생활을 시작했다.
법원에 다니면서 대학원석사과정(법철학)과 박사과정(저작권법)을 밟았고 최근에는 스승인 황적인교수(서울대법대)와 공동으로「저작권법」이라는 책을 퍼내기도 했다.
정씨는 86년 같은 장애자 법조인인 송영욱변호사(53)·조병훈판사(35) 등과 함께 「장애자고용촉진법」을 국회에 청원하기도 했다.
정 판사는 이 같은 「모범적인 장애극복」을 인정받아 86년 정립회관이 제정하는 삼애봉사상을 받았다.
황년대관장은 『정립회관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해 후배들에게 진로상담을 해주었고 제주에 내려갈 때도 관사가 널찍하니 제주도 소아마비학생들을 모아 가르쳐보겠다며 자료를 챙기는 등 같은 처지의 장애자 후배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무척 애썼다』고 회고했다.
〈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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