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길없는 길 - 내마음의 왕국(6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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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최인호 이우범 화
내가 무덤을 가리키면서 말하자 묘지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하였다.
『뭐라구? 이 무덤 속에 묻힌 사람이 젊은이의 할아버지라구?』
『…그렇소.』
내가 정색을 하고 대답하자 그는 피식 웃었다. 그의 얼굴에 정신이 돌아버린 사람을 마주하였을 때처럼 재미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젊은이가 고종황제의 손자란 말이오?』
『…그렇소.』
『이봐요, 젊은이. 젊은이는 낮술을 마시고 대낮부터 취해버리셨군.』
그는 발아래 구르는 소주병을 주워들면서 말하였다.
『할아버지구 나발이구 어쨌든 나가시오. 퇴장시간이 되어 문닫을 시간이 되었으니. 그리고 고종황제의 손자이신 젊은 청년, 나가실 때 쓰레기통에 이 술병을 버리고 나가시지. 자기가 마신 술병은 자기가 버리는 게 당연한 일이니까.』
허락된다면 나는 그 묘지기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뺨을 때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대가 내가 진정으로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내 발까지 무릎으로 기어와 발등에 입을 맞추고 살려줄 것을 간청할 것이다.
어디선가 왕릉의 문닫는 시간을 알리는 듯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생각하였다. 그 호루라기 소리가 내 꿈속으로 스며들어와 꿈속에서 헌병들의 호루라기 소리로 변했을 것이다.
나는 그 호루라기 소리에 쫓기듯 저물어 가는 왕릉을 그 비어버린 술병을 들고 빠져나왔다. 한낮의 그 ,뜨거웠던 태양빛도 저물어 있었고 왕릉의 뜨락에는 낙조(낙조)만 가득하였다. 소나무 숲은 석양빛을 받아 붉게 물들고, 그들은 한때 이 지상에서 최고의 권세와 최고의 영화를 자랑하던 왕릉 위에서 긴 그림자를 내던지고 있었다.
그날 그 홍유릉에서 낮술을 마시고 석인을 베고 누워 꿈꾸었던 악몽은 그 이후부터 나의 단골 레퍼터리가 되었다. 상복을 입고 방갓을 쓰고 상해임시정부로 탈출을 꾀하는 아버지 의친왕의 모습이 꿈의 풍경을 굴절되어 나타나는 그 악몽은 몸이 아플 때나, 새로운 일들과 마주하는 생의 전환점 같은 때면 어김없이 꿈으로 나타나곤 하였다. 으레 그 꿈은 끝나고 비명소리, 외마디 신음소리, 콸콸콸콸 흐르는 붉은 피가 혼합되어 고조되면 나는 소스라쳐 놀라 깨곤 하였었다.
나는 아버지의 무덤가를 돌면서 대충 손으로 뽑은 잡초들을 한데 모아 비탈진 잡목 사이로 던지면서 중얼거렷다.
『그땐 참 많이도 이 무덤가에 찾아오곤 하였지요,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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