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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살아서 행복합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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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언젠가 술자리에서 이런 식의 농담을 하는 선배를 본 적이 있다. "연애는 결혼 전에 졸업하고 와야 되는 거 아냐? 남편이랑 연애를 하려고 하면 어떡하느냐고." 그 선배의 말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아, 맞아!"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연애 시절에 하던 것처럼 영화를 함께 보러 가자거나 외식이라도 하러 나가자고 조르는 아내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다.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인 여자들은 그녀들의 남편에 대해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 "대화 좀 하자는데 그게 그렇게 힘들어? 나한테 관심을 가져달라는 거잖아. 나 좀 봐달라는 건데 그게 화를 낼 일이냐고!"

결혼 생활을 10년 이상 해온 아내들은 부부 사이에 대화가 없다고 불평한다. 남편들은 주말에라도 잠깐 쉬려고 하면 아내가 들볶아서 괴롭다고 하소연한다. 이건 마치 한집에 사는 개와 고양이 같지 않은가. 개와 고양이가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는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 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개가 반갑다고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에게 다가가면 고양이는 개가 싸움을 걸어오는 줄 알고 발톱을 세운다는 것이다.

일주일 내내 말 한마디 나눌 겨를도 없이 지내다가 주말이 되면 그래도 부부인지라 아내는 말이라도 붙여 보려고 남편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거실 소파를 점령하고 누워 리모컨만 만지작거린다. 아내는 일단 리모컨부터 뺏는다. 그러면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부부 싸움이 되고 마는 것이다.

왜 번번이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일까? 며칠 전, 절친하게 지내는 여자들끼리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자리가 있었다. 그날, 결혼생활 5년차인 후배가 결혼생활 16년째에 접어든 선배에게 물었다. "언니, 남편이랑은 대화가 안 돼요. 최소한 말은 하고 살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설마 너, 남편한테 다짜고짜 대화 좀 하자고 하는 건 아니겠지? 네가 정말 네 남편하고 대화를 하고 싶으면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되지."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와 올해로 16년째 살고 있는 그 선배는 부부 사이에 대화가 없다고 불평하는 후배에게 이런 충고를 해주었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먼저 남편이 무얼 좋아하는지, 무얼 하고 싶어 하는지 남편에게 관심을 가져보라고. 남편이 야구를 좋아하면 남편 옆에 앉아서 야구 중계를 함께 보라고. 남편이 좋아하는 걸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네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보라고. 심지어는 어린애들과 친해지려고 해도 그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가 무엇인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서로 몇 마디라도 주고받을 수 있지 않느냐고.

"넌 네 남편이 무슨 말을 해줄 때 가장 행복하던? 난 말이야, 다른 거 없더라. 당신하고 살아서 행복해! 그 말 한마디면 사르르 녹아나지 않니? 너, 네 남편한테 그런 말 해준 적 있어?"

"그런 말을 어떻게 해?" "왜 못해? 남편한테 그 말을 안 하면 누구한테 할래? 자, 따라해 봐. 여보,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오늘 꼭 해! 지금 당장 들어가서 해!"

그 선배의 말을 듣고 나도 참 많은 생각을 했다.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남편과 아내로 살다 보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가, 사랑의 깊이나 양보다는 사랑을 전하는 방식이 더 중요한 순간들이 찾아오기도 한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어서 표현하지 않으면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는 추석 연휴가 꽤 길다. 명절 증후군이라는 새로운 유행어가 만들어질 만큼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 괴로워져 버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남아있는 날들을 계속 남편과 아내로, 시부모와 며느리, 장인과 사위로 살아야 하고, 살고 싶다면, 올 추석에는 낯간지러워도 이 말을 한번 연습해보는 것이 어떨까?

당신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뒤로 미루지 말고 오늘이라도 당장.

이명랑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