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 철폐 등 친기업 개혁정책 10년 불황 터널 탈출 선봉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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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로 5년5개월 동안 활동한 뒤 퇴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26일 도쿄의 총리 관저를 떠나면서 주변 사람에게 인사하고 있다. [도쿄 로이터=연합뉴스]

"개혁에는 끝이 없다."

26일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으로 고별담화문을 읽어내려갔다. '성역 없는 개혁'을 외치며 취임했던 고이즈미는 내치에선 5년5개월, 만 1980일간의 재임기간을 개혁으로 수미일관(首尾一貫)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집권한 2001년은 일본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린 시기였다. 거품경제 붕괴 후 10년 이상 이어진 불황의 여파로 한 해 동안 1만9000개의 기업이 쓰러졌다. 1999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시절에는 정부가 각 가정에 상품권을 나눠주는 극약 처방까지 동원했지만 얼어붙은 소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성장률은 뒷걸음질만 쳤다. 그럼에도 고이즈미는 통화정책이나 공공사업 확대 등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구조개혁 없이는 성장도 없다"며 공공 부문과 정치-관료-기업 간의 유착 고리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5년5개월, 일본 경제는 긴 불황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후임자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3% 성장률을 내걸자 정부.여당에선 목표치를 4~5%로 상향 수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올 정도로 경기는 회복됐다. 곤두박질 일변도였던 주가와 부동산 가격 등 자산가치도 상승 중이다. 이 같은 경제 회생이 고이즈미 개혁의 직접적인 결과물이라고 단정짓긴 힘들다. 그보다는 기업들의 뼈를 깎는 체질 개선 노력과 오랜 불황에도 연구개발 투자를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로 보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고이즈미가 주도한 민영화와 규제 철폐 등 친(親)기업적 개혁 조치들이 기업의 실적 개선, 나아가 경제 회생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는 이 같은 실적과 특유의 호소력 있는 정치 스타일을 바탕으로 재임기간 내내 높은 인기를 누렸다. 그 인기를 바탕으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2798일), 요시다 시게루(吉田茂.2616일)에 이어 전후 셋째의 장수 총리가 됐다. 80년대 이후론 단연 으뜸이다. 또 선거 패배, 정책 실패 등의 책임을 지고 도중하차하는 것이 아니라 자민당 총재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기록도 91년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이후 처음이다.

하지만 고이즈미가 남긴 부정적인 유산도 만만치 않다. 아베 총리에 짐이 되고 있는 아시아 외교가 대표적이다. 취임 전 공약으로 내걸었던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에 고집스레 매달림으로써 한국.중국과의 관계를 역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았다.

국내적으로는 양극화 현상의 심화가 개혁의 부작용으로 어두운 그늘을 드리웠다. 자본주의 선진국 중에서는 유례가 없다는 평가를 받은 '평등 신화'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그 원인을 고이즈미 개혁에서 찾는 사람이 늘어났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고별사에서 "이제 내가 선두에 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한 명의 국회의원으로 조용히 지내겠다"고 말했다. 퇴임 후에는 언론에 등장하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본인의 그런 다짐에도 불구하고 향후 정국 추이에 따라 자민당이 위기에 처하면 '구원투수 고이즈미'의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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