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無 회담'된 한미 정상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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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9.15 한미 정상회담 얘기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과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기획.연출에 주인공까지 도맡은 한.미정상회담에 제목을 붙인다면 '3무(三無)회담'이 어울릴 것같다. 공동성명, 대북 핵실험 경고, 전략과 우선순위가 빠졌다는 얘기다.

정상회담처럼 잘 짜여진 정치 드라마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무대 전면만 봐서는 안된다. 대통령이 주연배우로 등장하는 이 드라마는 국가가 엄청난 돈과 시간을 들여 기획하고 연출하는 정치극이다. 따라서 정상회담은 항상 성공적이다. (언제 정상회담이 실패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적이 있던가!) 이런 이유로 '선수'들은 정상회담을 볼 때 겉으로 드러난 화려한 출연진이나 무대장치보다는 드라마의 빠진 부분을 주목하는 법이다. 왜냐면 이 빠진 부분을 잘 살펴보면 연출자가 감추고자 하는 무대 뒤편의 풍경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빠진 3가지 부분이다.

첫째, 이번 정상회담에서는 공동성명이 빠졌다. 청와대는 "작년 11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채택한 공동성명이 포괄적"이라며 "만날 때마다 성명을 내야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사정이 다르다. 한.미 관계에 밝은 서울의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측은 정상회담에 앞서 미측에 2~3차례 공동성명 초안을 보냈다. 그러나 양국은 협의과정에서 끝내 합의된 내용을 도출하는데 실패, 결국 공동성명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는 대북문제를 포함한 몇몇 이슈에 대해 청와대와 백악관간의 이견이 외교 당국자가 몇달씩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도 A4 용지 한 장에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얘기다.

둘째, 대북 핵실험 경고가 빠졌다. 현재 한.미 동맹에 대한 최대 도전은 북한의 핵실험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지난해 2월 핵 보유 선언을 한데 이어 미사일 발사 그 다음날인 7월6일 "우리는 보다 강경한 물리적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핵실험 가능성을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이번 정상회담은 양국이 대북 핵실험 경고를 낼 수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노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은 한 목소리로 북한에게 "핵실험을 하지 마라. 만일 핵실험을 강행 할 경우 강력한 대북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했어야만 했다. 또 핵실험 강행시 1991년 12월 채택된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역시 사문화된다는 점도 분명히 해야만 했다. 그러나 양국은 아무런 대북 경고도 못했다.

셋째, 전략과 우선순위 부재다. 노 대통령이 추진하는 핵문제 해결, 남북관계 개선,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자주, 한미동맹 발전,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일본 견제 등은 굳건한 한.미동맹이 전제될 때만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이를 위해 청와대는 선미후북(先美後北)입장에 기초해 전략을 세웠어야만 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지난 3년반동안 한.미정상회담 며칠간을 제외하고는 선북후미(先北後美)입장을 견지했다. 외교안보정책에서 상수와 변수를 혼동한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은 한.미동맹는 물론 남북관계도 흐지부지된 상태다. 그러나 정상회담 직후 청와대에서 나온 발표문에는 노 대통령이 전략이나 우선순위를 재조정했다는 아무런 조짐이 없다.

한마디로 이번 노-부시 정상회담은 70~80년대 한국 방화(邦畵)같았다. 영화 제목과 출연진은 그러저럭 괜찮았지만 완성도가 떨어져 입장료가 생각나는 드라마 말이다.

최원기 국제부문 차장 [brent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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