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일본의 뿌리 한국문화 제4부 <5>|일 국보1호 「반가상」은 한국인 솜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일본의 고대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숨쉬는 곳, 교토(경도)는 일본 불교문화의 총본산이다.
이 거대한 문화도시에 산재한 우리 고대문화의 요소를 좇기란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오랜 세월속에 이미 일본화돼버린 양식적 배경을 밝힌다 하더라도 반드시 복합적 연관속에서 추구하지 않으면 그 이해의 폭을 좁힐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고대불상의 연구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한일문화교류에 따른 역사적 배경을 전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주어진 현실만을 놓고 나름대로 해석을 내리기 일쑤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는 이방면에 조금만 유념한다면 금방 알수 있게된다.
따라서 작품이 만들어진 장소, 그것을 만든 인물, 그리고 제작시기와 같은 것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이를 제외한다면 그 작품의 생명력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이와같은 3대요소가 곧 미술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므로 이에 주목해야 한다는건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다.
특히 그중에서도 장소는 작품의 이해에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
장소는 곧 그 지역의 자연환경에 따른 작품의 재료를 표방하는 것이므로 작품의 이해에도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다.

<7대사찰중 하나>
우리는 고대 일본미술의 걸작인 고류지(광륭사)의 목조반가상을 조사하기위해 일본 최대사찰 히가시혼간지(동본원사) 앞에서 버스를 타고 약20분만에 고류지에 도착했다.
고류지는 일본의 불상 국보제1호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백제불로 전해지는 또 하나의 목조반가상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를 소장한 사찰로서 유명하지만 이 절이 우리 한반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이는 일본문화의 정통성이 외래문화의 유입으로 이룩됐음을 굳이 부정하려는 일부 국수주의적 발상과 함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역사적 사실이 많이 흐려진 결과때문이라고 하겠다.
먼저 고류지는 추고여제11년(603)에 세워진 사찰로서 시텐노지(사천왕사)·호류지(법륭사)등과 함께 소위 쇼토쿠타이시(성덕태자)가 건립했다고 하는 일본의 7대사찰 가운데 하나다.
처음에는 봉강사·진공사·태진사 등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 절이 귀화인 진씨에 의해 처음으로 건립됐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씨인 하타(진조하승)가 성덕태자로부터 불상을 받아 이를 모시기위해 하치노오카테라(봉강사)를 지었다(『일본서기』권22)고 한다.
이 때의 불상이 바로 오늘날의 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알려져 있다.
진씨 일족은 이곳 일대에서 큰 세력을 얻어 양잠이나 베짜는 업을 주로 했을뿐아니라 농경·양주를 비롯해 대륙의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성덕태자가 모시고 있던 이 반가상이 일본의 일부학자들에 의해 일본의 불상이라고 주장돼온 점이다. 하늘같은 성덕태자가 모시다가 귀화인 진씨에게 기증한 불상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러나 근래 양심있는 학자들 사이에는 이 불상이 일본의 불상이 아니라 반도에서 건너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
불상의 제작기법이라든지 재료가 일본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불상재료로는 주로 히노키(회목)를 쓰는데 비해 이 반가상은 우리반도에 자생하는 육송(적송)이라는것.
그러나 이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재료는 반도에서 가져와 일본에서 불상을 만들었다는 구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경우가 있다.
일본의 불상재료가 히노키이고 적송과 같은 육지의 소나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일본고대불상제작의 관례라면 구태여 육지의 소나무를 가져다 불상을 제작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여기에 일인들 주장의 허점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래 다시 만든 사찰내의 석비에는 도래불이었다는 과거의 안내기록을 바꾸어 『그 재료는 적송이다』는 간단한 기록만을 그 말미에 남기고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대문화에 대한 진실성을 외면하려는 것은 곧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 불상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스스로 내리지 않고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제 이 불상의 국적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지적해 둘 필요가 있겠다.
현재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고류지의 목조미륵보살반가상과 똑같은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83호)이 소장돼 있다. 이들이 재료만 다를뿐 서로 동일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적송으로 만들어>
예술작품의 발전단계가 단순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그리고 쉬운 것에서부터 점차 어려운 것으로 진행됐다는 것은 일반적 상식이다. 그런데 금동상이란 그 조형성뿐만 아니라 예술적 기량에 있어서도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작품이다.
그것이 현대도 아니고 고대사회의 열악한 조건하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같은 금동상이 탄생되기까지는 보다 쉬운 재료인 소조나 목조의 작품이 선행돼야 함이 순서다. 다만 우리나라에 소조나 목조의 고대작품이 전무하고 내구성이 강한 금석제품만 전하는 것은 유달리 많았던 전란의 결과일 뿐이다.
금동상의 존재로 보아 소조나 목조상이 유행됐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될수있다. 그러므로 국내에 유행하던 당시의 이같은 반가사유상이 일본으로 건너가 전래됐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종래에는 이 불상을 백제에서 건너왔다고 하다가(태진광융사사) 이제는 다만 그 재료가 적송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은 새로운 시사를 주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재료적 측면에서 볼때 도래불임은 틀림없으나 그 국적을 백제에만 국한시킬 수 없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기때문이다. 다무라(전촌원징)같은이가 이런 주장을 펴고있다.
불상의 재료가 경상북도 봉화·춘양 일원에서 가장 잘자라는 소위 양질의 춘양목(적송) 이란 점, 또는 삼국가운데 신라가 미륵불의 조상활동이나 신앙이 가장 왕성했던 사실등을 감안할때 다무라의 설은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하겠다.
새로 지은 자료관내에는 아스카(비조) 시대에 속하는 7세기부터 가마쿠라(겸창)시대(12∼14세기)에 이르는 수십구의 목조신장상과 보살상등이 즐비한 가운데 문제의 목조반가상은 그 중앙에 의연한 자태로 봉안돼 있었다. 한눈으로 우리의 금동상과 형제불임을 느끼게 한다.

<새로운 연구 필요>
단순한 삼산관에 긴 귀를 지닌 자비로운 안용, 입과 볼은 말할 것도 없고 가는 눈과 뚜렷한 눈썹등 온 얼굴이 미소를 짓고 있는듯하다. 이같은 자비로운 종교적 분위기는 알맞은 얼굴의 비례에서 찾아온 절묘한 조화의 결과라 할 것이다.
오른쪽 무릎에서부터 구부려 볼에 가볍게 갖다 댄 손가락과 팔의 율동은 아름답다못해 애처로움까지 느끼게한다..
어느 명공의 솜씨가 이처럼 아름다운 선의 기교를 부렸단 말인가. 날씬한 허리, 반나신의 반가사유의 대좌를 휘감아내린 상현좌의 의문, 목의 삼도, 이 모든게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금동상과 조금도 다를게 없다.
그 국적이야 어디이든, 신라든 백제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 불상이 지금 이렇게 이곳에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서도 우리들은 무한한 환희와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선조의 예지가 이국땅에서 생생히 살아숨쉬는 지금, 우리들은 보다 큰 긍지를 느끼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
재래의 백제 전래설에 대해 신라 전래설과 같은 새로운 학설의 대두, 또는 석비의 기각이 바뀌는 등의 일이 있다고 해서 반도전래설의 위치가 결코 흐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제부터 새로운 연구가 시작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더욱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굳이 다무라의 설을 따르지 않더라도 불상의 재료적 측면이나 조상활동등으로 보아 불상의 전래는 신라일 가능성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예술적 기량을 바탕으로 이후 석굴암 조각과 같은 희대의 걸작을 탄생시킬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류지의 이 불상은 신기에 가까운 우리 선인들의 조형의지의 결정이며 동시에 일본에 현존하는 우리의 영원한 미소라는 점에서 그 보존과 연구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장충식 <동국대 교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