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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거리」메운 시위대/전택원특파원 네팔민주화현장 1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천여명 사상불구 민주화 요구/현지달력은 우울한 새해 전날
【카트만두(네팔)=전택원특파원】 네팔 국영 네팔에어라인 410편으로 수도 카트만두에 도착한 것은 12일 오후11시30분. 간단한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선 공항 바깥은 이 나라의 오늘날 정국처럼 깜깜했다.
공항 밖에 나선 시간은 13일 오전1시무렵. 네팔 달력으로 새해 전날이자 올해 마지막 날이다. 네팔의 새해는 네팔 달력으로 4월14일에 시작된다.
공항을 채 나서기도 전 세계 제4위의 최빈국으로 알려진 네팔의 실상이 그대로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개의 짐보퉁이에 10여명의 짐꾼이 달려들어 서로 짐을 운반해주겠다고 싸우다시피 했다. 짐꾼 팁은 1∼2루피. 1달러가 공식환율로 28.7루피이니 짐꾼의 팁은 3∼7센트로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25∼50원 정도다.
공항 밖에는 밤잠을 잃은 어린이들이 지친 눈을 크게 뜨고 출발하는 자동차에 붙어 끈질기게 차창을 두들겼다. 구걸하는 아이들이었다.
지난 2월18일 이른바 「민주주의의 날」에 시작된 네팔의 반비렌드라왕정 민주화시위가 왜 가능했던가를 실감케 하는 모습들이었다.
새해 전날 카트만두의 시내는 내일이 설날임에도 불구하고 거리가 가라앉은 채 우울한 분위기에 싸인 모습이 역력했다.
1주일전인 지난 6일 20만 카트만두 시민이 민주화시위를 벌인데 이어 이미 군대 발포로 3백명이 숨지고 모두 1천여명이 사상한 비극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인구 50만의 카트만두시에서 20만명이 시위에 나섰다는 것은 이 도시의 성인 거의 전부가 시위에 참가했다는 셈이 된다.
이 나라 총리가 국왕에게 국정보고를 하면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한다는 왕의 권위와 비교한다면 네팔은 현재 엄청난 격동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히말라야 산록에 날아갈 듯 새집처럼 촘촘히 박힌 주택을 아래로 왕궁으로 이어지는 왕복4차선 중심도로는 「피의 금요일」로 불리는 지난 6일의 참사현장이었다.
12일 낮에도 이 거리에서는 1만∼2만명의 시민들이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지난 30년간 절대권력을 쥐고 티벳의 달라이 라마처럼 신정통치를 펴온 비렌드라국왕은 3만5천명의 구르카군대의 철벽같은 충성을 받고 있어 그의 통치권은 아직도 요지부동이다.
네팔국민의회당등 야당세력들이 12일 비렌드라국왕 「알현」을 요청하고 민주화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으나 성공여부는 아직도 미지수다.
네팔국왕은 36개 종족을 통합하는 구심체이자 이 나라 국교인 힌두교의 최고 신인 비슈누신의 현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문맹률 80%의 네팔에서 국민들의 국왕이자 비슈누신 화신에 대한 경배는 거의 절대적이다.
경배와 빈곤이 엇물린 네팔의 민주화시위와 이번 소요로 인한 이 나라 정국은 14일의 새해를 맞으면서도 밝지만은 않다.
네팔인의 태양 비렌드라국왕의 빛은 새해 전날 해발 6천m 이상의 히말라야산록의 구름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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