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헌재소장 정치적 타협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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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헌법재판소장이 임기를 마쳤는데도 후임자가 정해지지 못한 공백 사태가 발생했다. 대통령의 편법 지명, 후보자의 부적절한 처신 그리고 정부.정치권의 헌법 무지(無知)가 이런 어이없는 혼란을 불렀다.

우리는 후보자의 자진 사퇴나 대통령의 지명 철회 같은 원칙적 해결만이 옳은 길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열린우리당과 소야(小野) 3당은 정치적 타협이라는 또 다른 편법으로 문제를 넘기려 하고 있다. 법사위에서 별도로 '헌법재판관' 후보자 청문회를 연 뒤 헌재소장 임명동의안을 처리토록 하자는 것이다.

이 같은 편법은 헌법의 중요성과 현실적인 법률 문제를 간과하는 것이다. 지난번의 인사청문회는 절차상 하자 때문에 무효라는 견해가 많은데도 이를 인정해 임명동의를 해주면 결국 '하자(瑕疵) 있는 헌재소장'이 탄생하게 된다. 그럴 경우 어떤 부작용이 생길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편법 때문에 국회의 임명동의권이 무시됐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은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헌재가 자신들의 소장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헌재소장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임명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시민은 그의 직무를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낼 수도 있다. 헌재소장은 재판관의 자격도 갖고 있어 헌재의 여러 심판에 참여하게 된다. 위헌심판을 청구한 사람이 전효숙 재판관을 상대로 기피 신청을 내거나 전 재판관이 참여해서 내린 헌재의 결정에 불복하는 일도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대통령은 전효숙 후보자를 재지명해 법사위청문회와 인사청문특위라는 절차를 다시 밟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 후보자는 재판관 사퇴라는 편법을 수용했고, 민간인 신분으로 청문회장에 섬으로써 이미 위헌 논란의 흠결이 생겼다. 이런 후보자를 끌고 이 길을 다시 간다면 대통령과 헌재.국회, 나아가 국가의 위신은 또 다른 상처를 입을 것이다. 전 후보자가 자진 사퇴하고 대통령은 반성의 자세로 새로 절차를 시작하는 것이 순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