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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칼럼

선생님들이 분발해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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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논술시험 답안지를 채점해 본 서울대의 A교수는 요즘 거세게 불고 있는 '통합논술' 바람에 대해 기대와 우려를 동시에 갖고 있다. 그는 통합교과형 논술이 우리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기르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논리적.비판적.창의적으로 생각하는 인재다.

A교수는 동시에 "돈을 들여야 중간 수준 이상의 답안을 써낼 수 있는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사교육 의존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걱정이다. 그가 채점한 한 수험생의 답안지는 2002년 타계한 미국 철학자 존 롤스의 명저 '정의론'을 글 주제에도 맞지 않게 장황하게 인용했다고 한다.

A교수는 "롤스의 저서들은 나도 최근에야 완독했다"며 "그 학생은 학원 강사가 만들어 준 모범답안을 달달 외웠다가 써먹은 듯하다"고 말했다. '정의론'의 한 대목은 2006학년도 서울대 논술문제에 제시문으로 등장했었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은 풀(김수영의 시)만이 아니다. 사설학원들은 본능적으로 학교보다 훨씬 민첩하게 입시제도 변화에 대비한다.

서울대가 2008학년도 대입 전형에서 논술 비중을 30%로 높이겠다고 발표하고 다른 유명대학들도 뒤따른 것은 우리 교육을 위해 좋은 일이다. 진작 '찍기'교육을 탈피했어야 했다. 대학이 입시제도를 무기 삼아 중.고교의 팔을 비틀기는 했지만, 비튼 방향 자체는 맞다고 본다. 문제는 일선 학교가 감당할 능력이 있는가다. 사설학원들은 일찌감치 대비해 왔다. 서울 대치동 B학원의 안일도 원장은 "철학.경제학.정치학.국문학 박사와 현직 변호사, 수학.과학 강사들로 팀을 짜 대학들이 내놓은 예시 문항을 토대로 교재를 개발해 놓았다"고 말했다.

일선 교사들도 "통합논술이 사교육을 부추기는 것은 너무 뻔한 수순"이라고 입을 모은다. 서울 강북지역의 국어교사 최모씨는 "구조적으로 학교가 학원과 싸워 이길 수 없게 돼 있다"며 "논술은 첨삭 지도가 필수인데, 30명이 넘는 한 반 아이들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서울의 공립고 교사가 '방과후 학교'에서 논술을 가르칠 경우 시간당 받는 돈은 3만5000원으로 제한돼 있다. 학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교재 부담, 강의 부담에 첨삭지도 업무까지 겹치니 '써라, 거둬라, 끝'식의 수업을 벗어나기 힘들다"고 최 교사는 안타까워했다. 지방 중소도시는 더 열악하다. 천안의 한 고교 교사는 "일류대를 원하는 몇몇을 위해 학교 전체가 논술에 매달릴 수는 없다"며 "어차피 학교와 학원이 역할을 분담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사들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다. 논술 팀을 짜 착실히 가르침으로써 학생들을 학원에서 되찾아 오는 학교들도 적지 않다. 서울 용산고의 논술담당 정낙식 교사는 3년 전부터 담당인 국어과목 외에 철학.미학.윤리학과 사회과학을 따로 공부해 왔다. 논술지도를 염두에 둔 자구책이었다. 통합논술이 예고되자 다른 과목 교사들과 힘을 합쳐 예시문을 연구하고 교수법을 개발했다. 동창회가 든든한 덕분에 용산고 3학년생들은 공짜로 논술지도를 받는다. 교사들의 노력은 대학입시에서의 성과로 이어졌다.

통합논술 시행은 분명히 바람직한 변화다. 공교육이 이를 감당하려면 교사들이 바뀌어야 한다. "사실상 본고사를 부활시킬 우려가 있으니까 반대한다"(전교조)는 자세부터 버려야 한다. 당국은 교과과정을 유연하게 운용하고 재정지원을 확 늘려 교사들의 노력을 도와야 한다. 전교조가 반납하겠다는 성과급 750억원 중 절반을 통합논술을 지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데 투입하는 것도 방법이다(나머지 절반은 점심 못 싸오고 수업료 못 내는 학생들을 위해 쓰자). 통합논술은 오늘 인사청문회를 갖는 김신일 교육부총리 후보자의 지론인 수월성 제고와도 일맥상통한다. 선생님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