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카메라로 바라본 세상 9. 집 뒷마당 암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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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앙일보 사진부 암실에서 기자들이 작업하는 모습. 필자의 암실은 이런 풍경과 거리가 멀었다.

신문 독자사진 공모전 대상을 받고서 나는 차츰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보니 사진을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다. 셔터를 누르는 것은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사진을 완성하려면 필름을 현상(現像)하고, 인화(印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명동 선생이 일하는 신문사 암실에 찾아가 기자들이 작업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현상된 필름을 확대기에 걸고 빛을 통과시켜 하얀 인화지에 흑백이 바뀐 이미지를 비췄다. 그리고 인화지를 현상액에 담그면 붉은 전등 아래에서 서서히 형상이 떠올랐다. 신비로웠다. 기자들은 필름 현상 시간을 조절하거나 성질이 다른 인화지를 사용해 분위기가 다른 사진을 만들기도 했고, 네거티브 필름과 포지티브 필름을 겹쳐 인화해 입체 느낌이 나는 사진도 제작했다. 나도 해보고 싶었다. 그때까지는 미도파백화점(현재의 롯데백화점 영플라자) 부근에 있던 '쓰리 세븐' 현상소에 현상과 인화를 부탁했다. 사진을 직접 만들려면 암실(暗室)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사진을 제 손으로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암실을 지어주세요." "있으면 좋겠지만 한옥에 암실을 어떻게 만드느냐?" "뒷마당 구석에 지으면 될 것 같은데요." "한옥을 증축하려면 경찰서장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네가 허가를 받아오면 지어주마."

내가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아버지가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중부경찰서로 달려갔다. 고교 1학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고교생이 경찰서장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문에서부터 서장실 입구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제지를 당했다. 어렵사리 서장과 마주앉을 수 있었다. 그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찾아간 이유를 또박또박 설명했다. 신문사에서 상도 받았고, 직접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암실이 필요한데 허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서장은 암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대신 내 교복을 살펴보더니 공부하기 어렵지는 않으냐, 나도 아들이 있다, 경기고에 보내고 싶은데 실력이 모자란다는 등의 딴 이야기만 했다. 한참 이야기 끝에 그는 아버지 성함과 주소를 적어놓고 돌아가라고 했다. 며칠 뒤 경찰관이 와서 아버지에게 해준 이야기는 '정식 허가는 내 줄 수 없지만 암실 건축을 묵인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집 뒷마당에 두 평 남짓한 암실이 세워졌다. 아버지는 현상용 릴과 확대기.탱크.바트 등 도구 일체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암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상.인화 작업을 하려면 따뜻한 물과 찬물이 나오는 수도 시설이 있어야 하고, 배수가 되어야 하며, 독한 약품 냄새를 뽑아내는 환풍기도 필요했다. 내 암실은 이런 설비가 전혀 갖춰지지 않은, 말 그대로 '어두운 공간'에 불과했다.

춥고 더운 계절에는 사용할 수도 없었다. 오래 작업하다 보면 약품 냄새 때문에 머리가 띵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것은 나보다 아버지가 더 자주 암실을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여전히 가족사진을 열심히 찍던 아버지는 수시로 암실에서 사진을 만들며 동트는 줄 몰랐다.

김희중 (상명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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