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 등에 지푸라기 쌓이듯 한·미 동맹 약화 거의 등 부러뜨릴 지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노무현 정부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생존이라는 목표를 어느 정도 줄여도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노무현 정부의 초대 주미대사를 지낸 한승주 고려대 명예교수는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논란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11일 고려대 일민국제관계연구원(원장 현인택 교수) 초청 강연에서다. 그는"생존이나 안보를 위해 자존심을 얼마나 접어두느냐가 문제인데, 자존심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결국 두 가지 목표가 상충되고, 그중에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 1993년부터 1년10개월간 초대 외무부 장관을 지낸 바 있다. 한 교수는 한.미 관계에 대해 "낙타의 등에 지푸라기가 하나씩 쌓이고 있는데, 아직 낙타의 등을 부러뜨릴 정도의 마지막 지푸라기가 얹혀진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 가고 있다"며 동맹의 약화를 우려했다. 미국이 전작권 이양 시기를 2009년으로 제안한 것과 관련해선 "2009년 안(案)은 미국 내에서 충분한 검토나 내부 협의를 거친 게 아닐 것"이라며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의 개인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다음은 강연 주요 내용.

◆ 미국은 왜 전작권 이양에 적극적인가=한국이 자주권 얘기를 하는 것에 미국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미국은'한국이 싫다는데 마치 강요해서 자주권을 박탈하고 있었다는 얘기냐. 빨리 털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주한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 (미군) 주둔 국가는 일본만 남았다. 이는 일본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지금 한국이 싫다면 한국의 역할을 대체해도 좋다고 한다. 미군이 반드시 한국에 주둔해야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전작권을 이양하면 미군이 움직이는 것도 더 자유로워진다. 미국이 북한을 공격할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한국의 합의를 얻지 않아도 미군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

◆ 전작권 비용은 얼마=한국이 자주국방을 하면 무기도 많이 필요하고, 관련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물론 이 돈은 전작권을 가져오지 않더라도 어차피 써야 할 돈이라고 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돈을 써놓고 전체적으로 안보에 플러스가 되느냐, 아니면 미국의 공백을 메우는 정도냐, 그것도 안 되느냐다.

◆ 주한미군 추가 감축 가능성=미국은 2008년까지 주한미군 1만2500명을 줄일 계획이다. 미국이 전작권을 갖고 있어도 주한미군은 더 감축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전작권을 이양하면 감축 가능성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동안은 미국이 주한미군을 감축할 때 우리와 협의를 많이 했다. 미국이 예의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감축 얘기를 꺼내면서 주저하기도 하고 미안해하기도했다.

하지만 전작권을 넘겨주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과거의 협의 절차 없이 우리 측에 감축을 통보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북한은 우리가 전작권을 가져오면 위협적인 행태를 좀 더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 우발적이라도 서해교전 같은 일이 벌어지면 그때보다 우리는 위기감을 더 느끼게 될 것이다.

◆ 노 대통령 대북 발언의 배경=노 대통령이 얼마 전 헬싱키에서 북한 대포동은 미국엔 너무 초라하고, 우리에겐 너무 크기 때문에 위협이 아니라고 했다. 2004년 11월 미국에서도 그는 북한이 자기 방어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둘 다 한.미 정상회담 1주일 전의 일이다.

북한 미사일 800개 가운데 500개가 사정거리 300 ~ 500㎞의 스커드다. 남한과 중국 동북부 정도에만 갈 수 있는 미사일이다. 북한이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미사일이 남한을 겨냥하고 있는데 위협이 아니라면 그것은 대포동에 국한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한.미 정상회담에 이용할 것 같지는 않다. 노 대통령이 생각하는 것을 얘기해야 한다는 강박감의 결과인지, 그런 말을 하는 게 한반도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라고 여기는지, 모두 가능성이 있는 것 같다.

고현곤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