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축산물 파동 대책은 없나…/풍작이면 한숨짓는 “걱정 농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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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쌀ㆍ우유ㆍ감귤ㆍ무 등 주기적인 홍역 치러/농정불신으로 농민 자구행동 부쩍 늘어
모자라도 걱정,남아도 야단인 것이 농축산물이다.
먹는 양에는 한계가 있고 농축산물의 특성상 출하조절도 여간 어려운 무제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생산량에 조금만 변동이 생겨도 가격등락은 훨씬 커지게 마련이다.
요즘들어 남아도는 농축산물들로 농촌이 몸살을 앓고있다.
쌀이 그렇고 우유는 분유로 가공해 쌓아놓은 재고가 턱에 찼으며 제주에서는 감귤로 홍역을 치렀는가 하면 최근에는 저장해둔 무를 갈아엎는 일도 일어났다.
농축산물의 풍흉에 따른 파동은 주기적이다시피 겪어온 일이다.
인위적으론 한계가 있는 자연조건의 제약에다 혼선을 빚어온 농정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생산및 유통과정에서의 조절능력 결여,상품성제고에 대한 인식부족등이 어우러져 온데다 근자에는 수입개방까지 겹쳐 문제의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우유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2월말 현재 분유재고는 적정수준(7천t)의 세배 가까운 2만t을 넘어섰다. 이에따라 낙농가는 우유값을 상품이나 어음으로 받거나 그것도 안돼 길거리에 쏟아붓는 일까지 벌어졌고 유업체는 창고가 모자라 분유를 야적할 지경이다. 그럼에도 소비자들은 지난해 오른 우유값이 부담스러워 더 마시기를 주저하는 난센스가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이같은 우유파동은 수급불균형에서 비롯됐다.
85∼88년간 연평균 20% 가까운 높은 소비증가세 속에서 비교적 호황을 누려온 낙농가들은 저능력 소도 도태시키지 않고 사육수를 늘렸다. 이에따라 지난해 우유생산량은 전년비 8%의 증가율을 보였다. 반면 지난해 우유소비는 오히려 0.1%가 즐어들었다. 국내 우유소비의 대부분(89년 77%)을 차지하는 마시는 우유(시유)의 1인당 소비량이 30kg으로 선진국 수준에 거의 다다른데다 지난해 4월의 우유값 인상이 소비위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작년 4월 정부는 낙농가들의 강력한 요구에 밀려 원유가격을 13% 올려줬고 유업체는 이를 이유로 각종 유제품값을 15∼47% 인상했다. 가뜩이나 경기침체로 어렵던 터에 우유제품값 인상은 소비감소를 초래했고 이는 결국 우유파동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여기에다 식품원료로 대량수입되고 있는 유당ㆍ유장분말등과 미군 PX를 통해 유출되는 불법 유제품의 범람도 국내시장을 잠식,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앞서 말한 요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이같은 사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지난해 대풍으로 아직껏 몸살을 앓고있는 감귤의 경우는 어떤가. 제주감귤의 작년 생산량은 평년의 두배에 달하는 80만t이었다. 반면 값은 절반이하로 떨어졌다. 기상여건이 유례없이 좋았다는 것이 생산량 증가의 가장 큰 요인임은 분명하지만 이에 못지않은 원인은 재배농가들이 일손부족등을 이유로 제때 솎아내기를 하지 않았던 데도 있다. 결국 단위생산은 두배로 늘었지만 품질은 떨어져 가격폭락 사태가 빚어졌다.
더욱이 이같은 사태가 발생하게된 초기에라도 제값 받기를 위해 상품성이 떨어지는 물건은 과감히 없애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사태는 다소 호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제주 농민들로서도 바나나ㆍ파인애플ㆍ유채등 기존의 소득작물들이 수입개방에 밀려 도태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감귤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실정이며 생산농민의 조직화가 제대로 이뤄져 있지 못한 상황에서 효율적인 출하조절등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이같은 점에서 전남에서 벌어진 무 폐기사태는 역설적으로 하나의 새로운 시도로도 여겨진다. 무 폐기를 주도한 농민 스스로 생산비에도 못미치는 무를 제값을 받기위해 저장해둔 것중 일부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고 이같은 움직임 때문인지 폐기직후 무 시세가 오르고 있음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수입개방에 따라 마땅한 대체작물이 없어 무를 심은 면적이 늘어나는 통에 생산과잉과 가격하락사태가 빚어졌다는 주장은 지난해 전국적인 무 식부면적이 줄었다는 사실로 볼때 설득력이 떨어지지만 앞으로 수입개방의 진전에 따라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란 점에서 정책수립에 적잖은 시사를 주고 있다.
농축산물의 수급과 가격안정은 일차적으로 생산ㆍ수입및 유통정책을 총괄하는 농정당국에 있겠지만 아울러 이 과정에 참여하는 생산농민과 단체ㆍ상인ㆍ소비자들의 노력과 이해가 어우러짐으로써 가능할 것이다.<박태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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