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극장(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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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파조 같다』는 말이 있다. 표현이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또는 감상적인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신파」란 말은 원래 연극에서 나왔다. 재래의 형식과 전통을 지닌 구파연극에 대해 현대의 풍속과 인정비화등을 소재로 한 통속극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신파극의 산실이 유명한 동양극장이었다. 무용가 배구자의 남편이었던 홍순언이란 사람이 4천원을 밑천으로 상업은행에서 19만5천원을 대부받아 지은 연극전용 극장이다.
1935년에 충정로에서 개관한 이 극장은 대지 4백88평에 건평 3백73평의 2층 건물로 6백48석의 객석에 회전무대와 호리촌트 시설까지 갖춘 최신시설을 자랑했다.
소설가 최독견을 지배인으로 앉힌 동양극장은 홍해성,박진,이운방 등을 맞아들여 본격적인 신파극을 공연했다. 배우로는 박제행,서월영,심영,황철,김선초,차홍녀,지경순,김선영 등 호화멤버가 활약했는데 이때 김승호,한은진,유계선 등은 신인에 불과했다.
전성기시절의 동양극장 공연은 연중무휴로 한 레퍼터리를 보통 5일간 공연했다. 그래서 극본이 달려 8면의 전속작가가 한달에 평균 1편씩 쓸 정도였다.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동양극장의 숱한 연극 가운데 가장 화제를 뿌렸던 작품은 신파극의 대명사처럼 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임선규가 극본을 쓰고 박진이 연출한 이 작품은 개막 첫날부터 관객이 몰려들어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박진의 회고에 따르면 관객의 대부분은 기생들이었는데 연극이 공연되는 동안 모든 요리집은 술상만 덩그러니 방을 지킬뿐 기생들은 주석에서 손님을 끌고 동양극장에 가 실컷 울고는 다시 돌아와 술을 밤새워 마셨다고 한다.
연극의 직업화 내지 기업화를 이룬 최초의 극장이 동양극장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애환을 간직한 동양극장이 하루아침에 헐려버렸다. 그동안 연극 공연장으로 쓰이던 세종문화회관 별관이 서울시의회로 넘어가게 되자 연극계의 반발을 받은 서울시가 동양극장을 매입,전용관으로 활용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협의과정에서 소유주가 아무런 사전 연락도 없이 철거해버린 것이다. 문화를 사랑하는 선진국같으면 연극박물관을 만들어 길이 길이 보존할 그런 건물이 참으로 허무하게 자취를 감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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