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포연 속 이라크판 '안네의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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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 전에 우리는 우르릉대며 머리 위를 지나가는 비행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 소리는 가위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가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두렵다'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2003년 4월 2일, 개전 14일째)

전 세계가 CNN이 송출하는 바그다드의 '불꽃 쇼'를 지켜보던 순간, 전기마저 끊긴 암흑 속에서 청년은 또박또박 일기를 써내려갔다. 언제 다시 인터넷에 접속할지 알 수 없었지만 전쟁의 현장을 알려야 한다는 의지는 굳셌다. 마침내 두달치 근황이 한꺼번에 떴을 때 그의 블로그는 접속 폭주로 마비가 될 정도였다. "왜 전쟁을 피해 바그다드를 떠나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그는 답했다. "나의 블로그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존재하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란 말처럼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곧 행동하고 있다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이라크판 '안네의 일기'라 불리며 세계적인 블로그 붐을 몰고 온 살람 팍스의 '라에드는 어디 있나'(http://dear_raed.blogspot.com)는 원래 유학 중인 친구에게 쓰는 웹 편지였다 (필명 살람 팍스는 평화를 뜻하는 아랍어와 라틴어의 합성어다). 소소한 일상을 전하던 살람의 블로그는 이라크전이 임박함에 따라 전장 리포트로 변모했다. 미국에 대한 분노,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한 애증, "다음엔 평양에서 만나자"고 인사하는 종군기자에 대한 불신 등 살람이 전하는 현지 풍경은 '진실'에 목말랐던 네티즌의 갈증을 씻어줬다.

신간은 2002년 9월부터 올해 6월까지 블로그에 실린 글 일부를 뽑은 것이다. 긴박감은 사라졌지만 전쟁을 목격한 스물아홉 젊은이의 분노와 희망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종전 후엔 자원봉사대의 일원으로서 도시를 돌며 재건기의 혼란을 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한때 실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던 살람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은 '코란'보다 '도덕경'을 애호하고 매시브 어택의 음악에 심취한 평범한 건축가일 뿐이라고 밝혔다. 지금도 그는 지구 반대편에서 평화를 위한 타전을 계속하고 있다. 사이트 상단엔 미 하버드대 새뮤얼 헌팅턴 교수의 말이 인용돼 있다. "서구는 사상이나 미덕이나 종교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조직화된 폭력을 적용하는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했다. 서구인들은 대부분 이 사실을 망각하지만 비서구인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블로그=웹(Web)과 로그(log)를 합성한 신조어로 개인이 기록하는 인터넷 일지를 뜻한다. 답글을 통해 커뮤니티가 이뤄지는 '1인 대안매체'로서, 국내에서도 지난 7월에 가입자 1천만명을 돌파했다.

강혜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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