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칼럼

엄격한 아버지, 자상한 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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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년 전 미국에서 화제가 된 책이 지금 한국 정치인의 필독서가 된 데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2004년 미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용 선거운동 지침서로 나온 이 책이 하고자 하는 얘기는 대략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코끼리(미 공화당의 상징)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오히려 코끼리를 더 생각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인지 구조다. 따라서 공화당이 주도하는 의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공화당을 이길 수 없다. 민주당은 민주당의 프레임(인식 틀)에 맞는 의제와 언어로 유권자를 공략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이 참고할 만하다고 여겼을 법하다.

저자인 레이코프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부모' 모델로 공화당과 민주당 간 인식 틀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말 그대로 공화당은 엄한 아버지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데 비해 민주당은 자상한 부모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9.11 이후 미 유권자는 엄격한 아버지 모델에 더 끌렸고, 그 덕에 재선에 성공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엄부(嚴父)의 입장에서 미국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공화당의 엄부 프레임은 국제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레이코프는 지적한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권위자로서 아버지는 아이들이 그릇된 길로 갈 때 따끔하게 벌을 줌으로써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 공화당의 인식이라는 것이다. 엄격한 훈육을 통해 장차 아이가 제 몫을 하는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것을 아버지의 역할로 본다는 얘기다. 부시가 이라크에 본때를 보여준 것도 엄부 프레임 때문이고, 이라크를 혼내주는 데 유엔의 동의 같은 것은 필요 없다고 보는 것도 엄부 프레임 때문이라고 레이코프는 설명한다. 부시의 눈에 비친 유엔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싫든 좋든 이것이 유일 초강대국의 리더가 세상을 보는 시각이다.

엄부 프레임을 한반도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될까. 해방 공간에서 남북한은 졸지에 고아원에 버려진 형제 신세가 됐다. 미국과 소련은 사실상의 양아버지로서 남북한을 각각 입양했고, 남한은 양부(養父)의 엄격한 가르침 속에 자랐다. 나쁘지 않은 머리에 근면함이 보태져 최고 일류는 아니지만 그만하면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에도 합격했다. 반면 양부를 잃고 외톨이가 된 북한은 온갖 말썽 다 부리며 동네방네 시끄럽게 하고 있다.

대학생이 된 남한은 남한대로 "아버지에게 반대 좀 하면 안 돼요""아버지는 실수한 적 없어요"라며 양부에게 대들고 있다. "동생이 말썽을 피우는 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다"며 헤어진 형제 생각도 한다. 급기야 양아버지 품을 벗어나 자립할 결심까지 한다. 기력이 전 같지 않은 양부도 이제는 피곤하다. 이것저것 동네에 할 일도 많다. 굳이 자립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고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핵무기와 미사일로 동네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북한이 비행 청소년이라면 전시 작전통제권을 환수하겠다는 남한은 자립을 꿈꾸는 대학 신입생이다. 학업을 마치고 어엿한 어른이 되면 원치 않아도 홀로 서야 한다. 그때까지는 열심히 공부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 아닐까. 최우등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까지 가졌으면서도 여전히 양부 품에 남아 있는 일본 같은 나라도 있다. 엄한 아버지든, 자상한 부모든 마을 어른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는 미국의 시각은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