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주사주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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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소련을 「다국적이데올로기기업」이라고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외국학자는 지난해의 동구사태를 두고 「마르크스­레닌주의 대폭락」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크렘린에 본사를 둔 이 다국적기업은 새로 취임한 고르바초프사장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신상품을 개발,적극적인 판매전략을 벌임으로써 적어도 본사의 도산위기는 가까스로 넘기고 있지만 그 전략을 미처 따라오지 못한 동구의 여러 지사들은 경영부실로 이미 도산되었거나 도산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상주」의 폭락이 이들을 도산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러나 동구권의 「도산」은 결과적으로 「민주화」라는 새 경영기법을 도입해 새로운 창업의 문을 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그런 점에서 고르바초프의 신상품은 세계정세 전반에 밝은 전망을 주는 낙관론을 꽃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 미국에서는 고르바초프의 이 신상품에 대해 깊은 우려와 회의를 품은 한 논문이 신문에 소개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미국의 한 학술지에 실릴 예정인 이 논문의 골자는 소련의 공산주의는 스스로의 개혁능력이 없기 때문에 페레스트로이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으며 따라서 서방세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돕는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이다.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레닌식 체제는 폴란드나 헝가리ㆍ동독ㆍ체코ㆍ루마니아처럼 내부로부터 무너져내리거나,아니면 이를 피하기 위해 등소평처럼 무리하게 군사행동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설픈 원조나 도움은 소련국민들의 이익보다는 고통을 연장할 뿐이며 이것은 결과적으로 세계안정에 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내용이다.
공교롭게도 이 논문이 매스컴에서 화제가 되던 날 세계의 증시는 곤두박질하기 시작,동경의 주가는 한때 1.6%나 폭락했고 서울의 증권가에서는 고르바초프의 피격설까지 나돌았다. 그것은 고르바초프가 소연방내의 민족분규와 국내정치문제로 1월중에 예정되었던 외국지도자들과의 면담을 취소한 것으로 알려진 직후의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사는 증시의 주가가 아니라 평양의 「주사주가」가 언제쯤 폭락할 것인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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