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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배명복칼럼

바다 속에서 앨빈 토플러를 읽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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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태풍이 물러나기도 전에 쓰나미가 덮쳤다.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 문제로 나라가 들썩들썩하더니 지금은 온통 바다이야기뿐이다. 이골이 난 탓인지, 체념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러고도 나라가 굴러가는 걸 보면 "역시, 대한민국"이란 소리가 절로 나온다. 지난 며칠간 바다 속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바다에 빠졌다고 물고기 생각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앨빈 토플러(77)의 최신작인 '부(富)의 미래(Revolutionary Wealth)' 한국어판이 지난주 말 출간됐다. 전 세계 12개국 동시 발매란다. '미래의 충격' '제3의 물결' '권력이동'을 통해 지식혁명과 지식기반사회의 도래를 예견한 그가 15년 만에 작심하고 내놓은 역작이라는 선전문구가 요란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과연 토플러였다. '밑줄 쫙, 별표 팍팍'하며 형광펜을 들이댈 만한 혜안이 곳곳에서 번득였다고 하면 구루(Guru)를 따르는 추종자의 입 발린 소리일까.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한 키워드는 시간.공간.지식이다. 이 세 가지가 앞으로 부의 창출을 좌우할 '심층기반'으로 작용하게 될 거라는 얘기다.

그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위기 상황은 경제발전의 속도를 제도와 정책이 따라가지 못하는데서 생기는 '속도의 충돌'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 기업은 시속 100마일(160㎞)의 속도로 질주하고 있고, 작고 탄력적인 단위의 네트워크로 무장한 비정부기구(NGO)들도 시속 90마일로 기업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데 노조(30마일), 정부(25마일), 학교(10마일) , 정치권(3마일) 등은 거북이걸음으로 오히려 흐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얘기라지만 바로 우리 얘기다. 이 순간 대한민국이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것도 민간의 변화 속도를 정책과 제도가 따라가지 못한 탓 아닐까.

부의 중심축이 미국에서 아시아로 공간적 이동을 할 거라며 중국.일본과 나란히 한국에 별도의 장(章)을 할애한 점도 눈길을 끈다. 토플러는 한반도 미래의 핵심은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일종의 전술적 탱고로 변질한 북한 핵 협상에서 최종 승자는 가장 느린 템포로 춤을 춘 팀이 될 거라는 걸 아는 북한은 최대한 시간을 질질 끌려고 애쓰고 있고, 한국도 30년 앞을 내다본 점진적 통일 정책을 구사하고 있지만 과연 시간이 한반도를 기다려줄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속도 지상주의 문화와 신중하고 더딘 외교정책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한반도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그는 강조한다.

불과 40년 만에 산업화 물결을 타고 넘어 정보화 물결의 첨단에 선 한국에 대한 개인적 관심 때문인지, 한국 독자들을 위한 팬서비스 차원인지, 한국 시장을 겨냥한 마케팅 전략인지 알 수는 없지만 이 장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나을 뻔했다. 미래의 부를 결정하는 경제적 인자(因子)를 지정학적 문제에 무리하게 대입하다 보니 억지춘향이 된 것 같아 하는 소리다.

검색엔진 구글에 'future'라고 치면 26억3000만 건의 웹문서가 뜬다. 한글로 '미래'를 입력해도 1470만 건이 검색된다. '한국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future of Korea'를 치면 된다. 9100만 건의 문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미래는 미래학자의 머리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의 데스크톱에도 있고 노트북에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대부분 쓰레기라는 점이다. 지식과 정보의 바다에서 알곡을 골라내는 능력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압솔리지(obsoledge)'는 '쓸모없다'는 뜻의 'obsolete'에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를 결합해 토플러가 만든 신조어다. 무용(無用)지식이나 쓰레기 지식을 걸러내는 필터링 능력이 미래의 부를 결정짓는 핵심 지식 가운데 하나라고 본 토플러의 식견만큼은 별 다섯 개를 주고 싶다.

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