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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주자들의 가을 준비 ① 고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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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정치는 패션인가. 한여름 찜통 더위 속에서도 차기 대선 주자들은 찬바람 부는 가을을 생각한다. 그들의 시선은 하한기 이후 펼쳐질 '대권 정국'을 향해 있다. 주자들은 저마다 특성에 따라 콘텐트 채우기, 인지도 높이기, 정책 주도권 잡기, 조직 확장과 지지세 넓히기에 주력하고 있다. 칩거와 여행.강연 등 움직임의 형태도 다양하다. 시인 릴케는 가을을 예비하는 여름은 위대하다고 노래했다. 위대한 여름에 그들은 자기를 어떻게 단련하고 있는가. 차기 주자들의 준비와 고민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게재한다. 차례는 가나다순.

"감성에 호소하는 자극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싫다. 국가 운영을 위한 콘텐트를 알차게 다듬겠다."

장외 주자인 고건 전 국무총리가 장내 진입을 앞두고 있다. 28일 베이스 캠프가 뜬다. 요즘 그는 입버릇처럼 '콘텐트 정치'를 얘기한다.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에 여문 콘텐트를 수확하기 위해 고 전 총리는 '대통령 정책 수업'에 몰두하고 있다. 고 전 총리는 한여름이면 빼놓지 않고 바다낚시를 즐기는 낚시광이다. 하지만 올 여름엔 휴가를 반납했다. 그가 집중하는 수업은 경제 과목이다.

한 측근은 "고 전 총리가 워낙 모범생 스타일 아니냐"며 "정책 철학과 국가 경영의 어젠다가 명확하게 설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권 도전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건 서울시장 시절 부시장을 지낸 강홍빈 서울시립대 교수는 "앞으로의 정치일정을 감안할 때 차분하게 콘텐트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기는 지금뿐"이라고 했다. 콘텐트 수업을 마친 뒤 대권 출마선언→후보 경선→대통령 선거로 이어지는 긴박한 일정에 돌입하리란 얘기다.

그는 요즘 싱가포르 리콴유 전 총리의 '선진국으로 가는 길'을 탐독하고 있다. 연지동의 5평 남짓한 사무실은 벽면을 빼곡히 채운 책들로 더 비좁아 보인다. 책상 위에는 '2015 산업발전전략' '이제는 사람이 경쟁력이다' '2010년 대한민국 트렌드' 같은 경제.미래 관련 서적들이 펼쳐져 있다.

정책 수업의 교수진은 탄탄하다. 36년 공직생활로 맺어진 두터운 인맥의 덕이다. 우선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지낸 김중수 경희대 교수가 경제팀을 이끌고 있다. 이두원(연세대).김종석(홍익대).이진순(숭실대).홍기택(중앙대).김경환(서강대) 교수 등 중견 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다.

경제정책팀이 해답을 찾으려는 문제들은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차세대 성장동력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양극화는 어떻게 해소하나▶규제개혁과 금융산업 구조개선은 어떻게 할 것인가다.

고 전 총리 정책 수업의 특징은 현장주의다. 그는 "반드시 현장을 찾아 현실적 대응방안을 마련하라"고 한다. 요즘은 실업문제를 붙들고 있다. 곧 인력시장이 서는 성균관대 앞과 플라자 호텔 주변의 현장을 찾을 계획이다. 수업의 한 참여자는 "교수들도 미처 지적하지 못한 문제를 현장에서 끄집어내 주변을 놀라게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교육(이종재 서울대 교수, 곽병선 경인여대학장), 복지(정경배 전 보건사회연구원장)도 주요 과목이다. 12일엔 '문화산업 경쟁력 높이기'란 주제로 모임을 가졌다. '북한통'으로 통하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과도 대화를 한다. 유종하 전 외무부 장관, 박수길 전 유엔대사에게 외교문제를 자문하고 있다.

정책 수업의 목표는 '선진국 진입을 위한 발전전략 수립'이다. 그는 강연에서 "우리나라가 2015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3만5000달러, 세계 10대 선진대국으로 진입하지 못하면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기회를 영영 놓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종종 '상황을 헤쳐가는 정치형 리더'가 아니라 '감이 익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행정형 리더'라는 지적을 받는다. 이 때문에 대권 도전 선언의 시기를 놓고 내부 진영에 미묘한 갈등도 감지된다.

'고건발 정계개편론'을 주도해야 한다는 정치인 중심의 측근 그룹은 고 전 총리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국민중심당을 아우르는 범여권 대통합에 적극 나서라고 주문한다. 28일 발족할 '희망한국 국민연대(희망연대)'가 그 전초기지가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고 전 총리는 "희망연대는 정치 결사체도 아니고 신당을 만들기 위한 조직도 아니다. 정치 소비자 운동"이라고 여전히 행정형 답변을 내놨다.

언제까지 기다리려는 것일까. 그는 최근 기자와 만나 "역발상의 대가인 노무현 대통령은 끝까지 당에 남을 것이다. 결국 노 대통령에게 반발하는 세력들이 열린우리당을 이탈하면서 정치권 이합집산이 본격화될 것"이란 말을 했다.

-그러면 반발 세력이 열린우리당을 이탈하는 시기를 언제로 보십니까.

"아마 연말께…."

고 전 총리는 아마 연말께 정치형 리더로 변신할 것 같다.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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