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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환상의 터널-그 시작과 끝|전 남노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 편력 회상기(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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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미군이 서울에 첫 진주한 1945년9월8일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역사적인 의의가 담긴 뜻깊은 날이기도 했다.
바로 이날 조선 공산당이 1928년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 해체 된지 17년 만에 재건의 기틀을 잡은 공산주의 열성자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박헌영의 소위 재건파 공산당과 최익한 등의 장안파 공산당이 하나가 됨으로써 9월11일 조선 공산당의 역사적인 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해방 직후인 8월18일 광주에서 상경한 박헌영은 경성 콤 그룹을 중심으로한 당 재건운동에 착수하는 한편 이와 함께 장안파 공산당의 와해·흡수공작에 나섰다. 박헌영은 공산당 재건을 위한 1차 회의를 계동에 있는 홍증식의 집에서 열었다.
전에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홍은 충남 당진 출생으로 「공산당의 조조」라고 불릴 정도로 수완이 좋았고 당초에는 장안파에 가입했으나 박헌영의 상경 이후 등을 돌렸다.
1924년 당시 동아일보에서 신문발송을 하고 있던 박헌영을 조선일보 편집국 기자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홍증식이다.
이날 회의에 나온 사람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이주상·이관술·김삼용·이현상 등 17∼18명이었다고 한다.
박헌영은 이 자리에서 경성 콤 그룹을 중심으로한 당 재건방침을 밝히고 조직문제는 일제 때부터 그 역량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김형선·김삼용에게, 당 재건 자금조달은 홍증식, 장안파 흡수공작은 권오직·최원택에게 맡겼다.
1차 회합을 가진 이들은 8월20일 낮 낙원동에 있는 안중빌딩 2층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개최했다. 이것이 소위 재건파 공산당으로 이제 공산당은 장안파와 함께 2원화 된 셈이었다.
당시 종로2가 장안빌딩과 소공동 근택빌딩에 자리 잡은 두 파는 각기 자기네들끼리 몰려 다녔고 개인적으로라도 상종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이 같은 팽팽한 대립도 잠깐이었다.
박헌영의 등장은 장안파 공산당을 조직한 전향자·유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박헌영이 재건파 공산당을 조직하고 8월 테제를 발표하자 대세는 박헌영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의 장안파 와해공작은 집요했다. 당초부터 박은 장안파와의 통합을 꿈꾸고 있었다.
미군 진주의 소문이 무성하던 9월 초 어느 날 박헌영은 느닷없이 권오직을 찾았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이 자리에서 장안파와 재건파 두 공산당의 합당 추진 지령이 권오직에게 주어진 듯하다. 그때는 이미 장안파가 해체를 결의(8월24일) 한 후 지리멸렬한 상태에 빠진데다 이승엽 등의 공작으로 장안파 일부에서는 코민테른의 1국1당 주의에 입각, 통일된 공산당을 조직하자는 의견이 나오던 때였다.
이에 대해 정백 등 몇몇이 반대의 뜻을 밝혔으나 중도에서 사상 운동을 이탈했다는 자책과 재건파의 집중공세에 휘말러 대세는 통합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이에 따라 9월3일 공산당 통합대회라는 명목으로 홍증식의 집에서 1차 연석회의를 가진 후 그 뒤를 이어 9월8일 드디어 열성자 대회가 홍의 집에서 열려 공산당 재건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열성자 대회 개최 전날인 9월7일 현칠종이 이정윤 아지트를 찾아왔다. 현칠종은 평안도 출신으로 8·15 때 대전 형무소에서 나왔었다. 현은 이정윤이나 이지적과는 달리 말소리도 크며 혈기의 사나이였다. 그는 『박헌영 동지의 노선이 옳으며 박헌영을 중심으로 당을 재건해야된다』고 이정윤과 이지적에게 역설했다.
9월8일의 열성자 대회에는 박헌영을 비롯, 홍증식·이영·최익한·정백·정재달·최원택·이정윤· 이지적·하필원·이승엽·권오직·조두원·안기성·강병도·현칠종·김상혁·이청원 등 약 60명 가량이 모였다.
안기성의 사회로 박헌영이 기조보고를 했다.
박은 『재건되는 당 중앙본부에는 노동자 빈농출신이 많이 등용되어야하며 그러므로 과거의 파벌 두령이나 운동을 휴식한 사람들은 중앙본부에서 제거되어 전투적이며 청신한 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박헌영의 보고와 결론을 듣고난 뒤에 조두원이 일어서서 ⓛ박헌영 동지의 보고와 결론을 지지한다. ②재건당 중앙간부 선출은 노동자·농민의 조직을 가진 각 그룹과 협의하고 박헌영에게 일임한다. ③당대회를 조속히 소집하며, 우선 당면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행동강령을 작성할 것을 제안했다.
조두원의 제안을 표결한 결과 4, 5명을 제외하고 절대다수가 찬성, 통과되었다. 이 계동 열성자 대회의 결의에 따라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 공산당 재건조직 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조선 공산당이 드디어 재건되었다. 이 날이 9월1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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